1988~1992년, 5년간의 임기 중 주택 200만호를 짓겠다는 것은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다. 연 평균 40만호를 짓겠다는 것이다. 83~87년 5년간 모두 120만호, 연평균 24만호를 지었으니 여기에 비해 67%를 더 짓겠다는 야심적인 목표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주택건설 정책은 그 당시 우리 경제 발전단계에 비추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국가적 대역사였다.
88년의 1인당 총소득이 4,300달러였다. 먹는 것과 입는 것 등 기본 수요는 충족이 되고 국민욕구는 이제 주택과 복지 쪽으로 이동하는 그러한 단계였다. 더구나 민주화의 봇물이 터지는 대세 속에서 88년 9월의 성공적인 서울올림픽으로 인플레이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경제는 87년과 88년 모두 12%의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총통화는 연 20%씩이나 팽창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국민들의 주택욕구가 분출되었는데 무주택자는 내 집 마련을, 그리고 집이 있는 사람은 더 나은 집을 찾는 욕구였다. 그래서 88년만 하더라도 소비자 물가가 7% 올랐는데 종합주가 지수는 900을 넘어 연간 70%이상 올랐고 집값은 21% 그리고 땅값은 28%나 올랐다.
그런데 그 당시의 주택공급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총가구수와 주택수의 비율을 나타내는 주택보급률은 75년 74.4%, 80년 71.2%, 87년 69.2%(2008년은 100.7%) 등으로 계속 내려갔으며 특히 서울의 경우는 88년 56%에 불과하였다. 그 동안의 군사정권 하에서 산업투자에 주력한 나머지 주택투자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이처럼 주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기존 주택도 대부분 헐고 다시 지어야 할 상황이어서 주택 200만호건설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앞에서 나는 청와대 경제비서실이 한두 가지를 제외 하고는 정책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관계부처가 주도하도록 했다고 했는데 그 한두 가지 예외 속에 200만호 건설정책이 들어 있었다.
나는 홍철(인천대 총장) 건설담당 비서관과 함께 200만호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200만호의 건설은 도시영세민ㆍ서민ㆍ중산층 이상 등이 고르게 혜택을 입도록 배분하고 건설에는 정부와 민간 기업이 모두 참여토록 했다.
그래서 도시영세민을 위한 영구 임대주택과 25평 이하의 서민용 주택은 주택공사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이 주로 맡고 25평 이상의 고소득자를 위한 주택은 민간 사업자에게 맡긴다는 원칙도 세웠다.
가장 큰 문제는 택지였다. 그렇게 엄청난 물량을 공급하려면 대규모의 값싼 택지가 필요한데 서울의 도심에서는 그러한 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 외곽은 그린벨트로 둘러싸여 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린벨트는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입장이었다.
예컨대 과천 주변에 택지로서 적합한 넓은 땅이 그린벨트로 묶여있었는데 이 땅의 개발도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외곽 그린벨트를 넘어 광화문에서 반경 25km 정도로서 지하철로 1시간 이내 거리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기준에 따라 입지를 찾아 본 결과 분당 평촌 산본 인천중동 등 네 개 지역이 후보지로 떠올랐는데 이 네 개 지역은 그 동안 여러 차례 개발이 거론되어왔던 터였다.
이때만 해도 일산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네 개 후보지중 분당과 인천중동은 개발을 유보하자는 것이 당시 최동섭 건설부장관의 의견이었다.
분당은 596만평의 면적에 9만8,000호의 주택을 지어 인구 39만명을 수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지역은 그린벨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영구보존가치가 있으니 그린벨트에 준해서 관리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법이 아니라 행정령으로 그 동안 그린벨트처럼 개발을 제한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개발규제에 대한 법적 다툼이 생긴다면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린벨트의 규제원칙을 고수하려던 건설부로서는 개발에 부정적이었다.
한편 인천중동은 165만평의 면적에 4만3,000호의 주택을 지어 17만 명의 인구를 수용한다는 것이었는데 교통사정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경인고속도로가 이미 포화상태에 있어 경인 교통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개발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건설부의 의견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건설부의 의견을 받아 들여 우선 평촌과 산본 두 곳을 먼저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평촌은 150만평, 산본은 127만평의 면적에 각각 4만3,000호의 주택을 지어 17만 명씩의 인구를 수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건설부와 협의한 끝에 이 두 지역의 주택건설에 즉시 착수하기로 했다.
이때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산본에는 국회의원 7선에 민정당 의장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씨의 굳?약 17만평이 주택건설 계획지구에 포함되고 있었다. 내가 가서 보니 이씨 대대로 이어온 그 선산은 산본의 수려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산본 전체 계획면적의 10%가 넘는 규모였다. 이재형 씨는 이 토지를 제외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내게 여러 차례 오셨고 두어 차례 대통령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으며 그 후 내가 건설부 장관으로 간 뒤에도 끈질기게 제외해주기를 요구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대로 조상을 모셔온 산이니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나는 대통령께 '그 땅을 제외시켜주면 정부도 다치고 그 분도 다치게 됩니다. 이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십시요'라고 말씀드렸다. 고인이 되신 그 분께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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