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은 학계에도 과거의 재조명, 새로운 발견 등으로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많았다. 연초 '녹색'이라는 화두가 불거지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담론도 계속됐지만, '100년' '90년' 혹은 '60년'이라는 시간의 매듭이 유난히 부각된 한 해이기도 했다. 200여년 만에 먼지를 털고 탈초된 정조의 편지 뭉치는 학계 안팎의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다중지성, 금융위기 등 현실 문제가 핵심 논제였던 지난해와는 무척 다른 분위기였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 한국전쟁 발발 60년, 4ㆍ19혁명 50년이 되는 내년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질 듯하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사살 의미와 그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연구가 잇달았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동북아역사재단, 안중근의사숭모회,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안중근ㆍ하얼빈학회 등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단체마다 안중근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열었다. 일본사학회는 안중근이 아닌 이토 히로부미에 초점을 맞춘 한ㆍ일 공동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학자들의 관심은 저격이라는 외적인 사건보다 안중근이 꿈꿨던 동양평화의 내적 가치에 집중됐다. 평화와 암살이라는 모순 속에 내재된 연결고리를 탐색하거나, 낭만적 레지스탕스로서 안중근의 삶에 접근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특히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라는 현재 세계 질서의 변동과 동양평화론의 공통된 지향점을 추출하려는 시도가 눈길을 끌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안중근 평전> 등 관련 저작도 속속 출간됐다. 안중근>
임시정부 수립과 김구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었던 올해는 항일운동사 연구가 활발했다. 3ㆍ1운동의 의미를 20세기 초 정치ㆍ문화ㆍ사상의 세계적 흐름에 비춰보려는 흐름이 특징이었다. 민족해방을 넘어 근대의 다양한 주체들의 자기해방운동으로 3ㆍ1운동을 바라보려는 시도였다. 국내외 학자들은 3ㆍ1운동을 기폭제로 이집트, 인도, 중국 등에서 잇달아 벌어진 해방운동의 시기를 '동아시아의 윌슨주의 시기'로 규정하기도 했다.
60주기를 맞은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궤적을 되짚는 움직임도 눈에 띄었다. 여성참정권, 노동권 등을 보장한 임시정부의 선구적 면모와 그것이 해방공간 한반도에 착근할 수 없었던 배경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중국의 쑨원이나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 등과 비교해 정치지도자이자 평화주의자로서의 김구를 되돌아보는 시선이 많았다. 간도협약(1909) 체결 100년을 맞아 그것의 불법성을 알리려는 학계의 노력도 있었다.
정조의 비밀 편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2월 공개한 정조(1752~1800)의 편지들은 독살설 등 그를 둘러싼 세인의 관심과 맞물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99통의 내밀한 편지 수신인은 정조와 정적 관계로 알려졌던 심환지(1730~1802)였고, 담긴 내용도 호학군주로 추앙받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육성을 통해 되살아난 정조는 격정적이며 노회한 정치가였고, 당대의 역사도 노론과 남인의 단순 대립 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변주되며 사실로 인식됐던 정조대의 이야기 뼈대가 뒤집히면서,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의 대중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녹색성장의 허와 실
이명박 정부는 탄생과 함께 '4대 강' 아젠다를 들고 나왔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정부는 올해 초 역설적으로 녹색의 구호로 그 아젠다를 감쌌는데 이는 한 해 내내 진보적 학계의 비판 대상이 됐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집중 투자가 경제를 이끌며, 저탄소 녹색 성장이 가능하다는 정부의 논리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토건 파시즘'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파괴적 개발보다 분배와 사회서비스를 확충하고 민주적 협치(거버넌스) 시스템을 확대해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은 한 해였다.
역사교육 위축 논란
역사학계는 고교 교과과정에서 역사 선택과목 수를 줄이고 1학년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바꾸기로 한 교육과학기술부의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대한 반발로 시끄러웠다.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전국역사교사모임 등은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열고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역사교육이 붕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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