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성탄절 인사가 유난히 정겹게 들렸다. 딸 아이와 그 또래 여사원이 천연덕스레"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나도 그리 답했다. 하기야 나도 소싯적 외국인이나 어린 딸과는 그렇게 인사했지….
'메리 크리스마스'가 정겨워진 것은 내 아이 세대가 거기에 익숙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몇 십 년 지나도 어색하던 서양 풍습이 우리가 키우고 가르친 다음 세대를 통해 비로소 친숙해진 느낌이다. 문화 이식이든 과거 청산이든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야 한다던 이치가 이런 것일까, 혼자 엉뚱한 생각을 했다.
평등주의와 개인주의 타협
미국은 24일 건강보험 개혁안의 의회 통과로 1965년 이래 가장 축복 받은 성탄절을 맞았다고 한다. 1965년은'위대한 사회'를 표방한 존슨 대통령이 사회 안전망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상징성을 지닌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도록 선진국에서 유일하게 '전국민 건강보험'이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민영뿐인 건강보험은 문턱이 높아 4,500만 명 정도가 보험 없이 산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나라라는 미국이 전국민 의료보장은 열악하다는 걸 일찍부터 아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될까. 워낙 잘 사는 나라이고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인데 그럴 리가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서 미국은 의료보장과 유아사망률, 평균수명 등 의료와 건강의 주요 지표에서 중진국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번 개혁안으로 3,000만 명 이상이 정부 보조를 받아 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된다. 그래서 역사적 진전이다. 그러나 루스벨트 이래 줄곧 추진한 공공보험 도입은 상원이 배척했다. 이른바 '의료 사회화(Socialized Medicine)'를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동일시하는 우파적 인식이 그만큼 뿌리 깊다. 국민의 63%가 건보 개혁을 지지하면서도, 더 많은 수가 보험지원을 위한 세금 인상에는 반대한다. 바탕은 국가보다 개인을 믿는 개인주의 사회이다.
의료 사회화의 선구는 19세기 비스마르크 시절 사회보험을 도입한 독일이다. 사회 복지에 관한 한 미국을 비웃는 독일은 거꾸로 민간 건강보험 허용 폭을 놓고 오래 다퉜다. 지금은 자영업자와 연 소득 5만 유로, 8,500만원이 넘는 봉급 생활자 등은 공공보험을 탈퇴, 민간보험을 선택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좌파적 평등주의와 우파적 개인주의의 타협이다. 공공의 이익과 사적 욕망, 이상과 현실 사이의 화해일 수도 있다. 유럽이 대개 비슷하다.
곧 새해다. 메리 크리스마스보다 한층 보편적인 그 행복한 새해, 'Happy New Year'이다. 다만 우리 지식인들의 새해 전망은 늘 행복하지 못하다. 오히려 어둡고 쓸쓸하게 진단하고 예측해야 스스로 정의롭게 여기는 듯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정말로 이 축복의 계절에 불행한 이웃과 나라를 걱정하느라 마냥 암담한 심정일까.
우리 사회에 어둡고 쓸쓸한 구석은 아직 많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그들의 행복과 불행의 잣대, 전통과 이념의 틀로 현실을 재단하기에는 기초가 여전히 허약하다. 그렇다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가 한 세대 이전의 암울한 상황을 닮은 듯 그리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왜곡이다. 오히려 그처럼 우리 사회가 타락과 후퇴, 파국과 말세로 치닫는 듯 묘사하는 이들이 더 나은 내일, 행복한 새해를 향한 기대를 가로막는 게 아닌가 싶다.
'악마론적 코드' 버려야
혹독했다는 개발독재 시절에도 우리 사회는 인권 억압만 겪은 게 아니다. 경제 성장뿐 아니라 전국민 건강보험 등 유럽식 평등주의를 도처에 심었다. 그게 권력과 대중의 합의, 타협이었을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드높은 진보의 열기와 지금의 보수 회귀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런 진실을 외면하는 강경 우파와 좌파가 저마다 이른바 '악마론적 코드'로 세상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바람에 사회가 온통 불행한 그림이 된다. 다음 세대가 더 클 때를 기다려야 행복한 새해가 올까.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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