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2월 구속되어 79년 10∙26사건 후 석방될 때까지 약 3년 간의 징역생활은 재소자인권투쟁으로 보낸 나날이었다고 할 만하다. 71년 구속되었을 때 재소자들이 겪는 여러 참상들을 보면서 '저래서야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교도소도 인간이 사는 곳이다'는 기치를 내걸고 교도소 당국과 다투면서 많은 건의를 했었다. 죄를 지었더라도 자유의 제한 곧 자유형으로 족해야지, 자유의 제한 이외에 비인간적인 생활이 강요되어서는 안 될 텐데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교정∙교화는 그야말로 말 뿐이고 '도둑놈 양성소'가 되어 있었다. 특히 대체로 무식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인데도 무식을 면하는 데 가장 필요한 신문구독과 필기도구 사용은 금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재소자 처우개선과 교정행정의 일대 쇄신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하고서 상고이유서를 쓸 때 재판과 관련해서는 조금만 쓰고 재소자 인권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마침 교도소 안의 분위기도 재소자인권문제가 일상적으로 제기되는 분위기였다. 유신체제말기라 시국사범이 원체 많아 매일같이 교도소 당국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78년 3월 서울구치소를 발칵 뒤집어놓은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했다.
당시 이런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박석운, 이범영, 성종대 등이 모두 나와 함께 12사 상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12사 상이 투쟁의 본거지였다. 평소 우리는 재소자 처우개선을 위한 대규모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해두고서 계기를 찾고 있었다.
접견, 운동, 목욕 등과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아야 그것은 교도소 당국의 부정과 관련된 일이 아니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 같아 결국 교도소 당국의 부정을 고발할 수 있는 문제를 찾았다.
그래서 부식이 정량대로 나오지 않음을 알아내고는 두부의 정량을 문제 삼았다. 두부가 배식된 날 후배 중의 한 명이 두부의 양이 정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문제 삼아 배식된 두부를 가지고 보안과에 갔다. 저울에 달아보니 정량의 반 정도밖에 안 됐다.
사방으로 돌아와 전 재소자에게 두부가 정량의 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큰 소리로 공표하고는 곧 바로 '반쪽 두부 돌려주고 온쪽 두부 찾아먹자'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에 돌입했다. 교도소에서 구호를 크게 외치는 것을 '샤우팅'이라 했는데, 이번 샤우팅에는 일반재소자들까지 참여하여 서울구치소가 떠나갈 듯했다.
직원들이 대거 12사 상으로 몰려와 샤우팅을 주도한 시국사범들을 끌어내기 시작해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결국 시국사범들을 전원 끌어내 9사 상에 몰아넣고는 계구로 온몸을 꽁꽁 묶고는 방성구까지 채웠다. 밤이 돼서야 계구를 풀어주었다.
9사 상으로 끌려온 우리들은 다음날 새벽 전국 교도소로 이감되었는데, 이감은 갔지만 우리의 투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분명했다. 뒤에 들으니 법무부에서 서울구치소에 감사를 나와 용도과장을 비롯한 몇 명은 중징계를 받고 서울구치소장도 경고조치를 받았다고 했다.
이번 투쟁으로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된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재소자 인권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고, 이것은 앞으로 전국 교도소에서 재소자 인권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될 것을 예고했다.
우리들 시국사범 30여명은 전국교도소로 흩어졌는데, 나는 마산교도소로 가게 되었다. 마산교도소에 있는 동안 일반재소자를 선동했다는 몇 차례의 경고를 받은 후 곧바로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대구교도소에는 남파간첩을 비롯한 공안사범만을 수용하는 특사에 수용되었는데, 내가 이감 가자마자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이 전개되었다. 강기종, 최열, 김용석, 정화영, 서승 등이 재소자 권익투쟁을 주도했는데, 탁월한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투쟁은 16일간의 단식을 하고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었던 창문의 철망 제거는 이루지 못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어서 나는 치밀한 작전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대구교도소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우선 대구교도소에는 15년 이상 징역을 산 장기수가 30여명 있었다. 그 당시 28년 간 징역을 산 분도 있었는데, 민족의 아픔이요 민족의 수치였다. 민주화가 되고서 그나마 조기에 석방되었는데도 34년간 징역을 산 분이 있었다.
그리고 대구교도소에는 재일동포 형제간첩단사건의 서승이 있었는데, 그는 함께 구속된 법대 후배 서준식의 형으로 나와 대단히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출소해서 '옥중 19년'이란 옥중회고록을 내면서 나를 제갈공명에 비유했다. 물론 우정의 표시였다.
그런데 서승은 내가 개혁신당 창당 문제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나를 찾아와 정치를 하지 말고 재야활동을 계속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권할 만큼 그의 권유는 강력했다. 당위만을 내세우는 나의 고집에 크게 실망했을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최열과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최열은 재소자 권인투쟁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공해 관련 책을 열심히 읽었다. 내가 '독재 타도하기도 바쁜데 웬 공해 공부냐'고 힐난하듯 말했더니, '앞으로 공해문제가 심각해질 것이기에 지금부터 공부해야 한다'는 거였다. 나로서는 박정희 정권의 공해 무시정책에 반감을 가지는 정도였었는데, 그에게 그런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한국 환경운동의 개척자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부산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상경이 내 옆방에 있었는데, 머리에서 똑 소리가 나는 사동 전체의 귀염둥이였다.
대구교도소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3인조 배구였다. 하도 즐거워 교도소밖에 나가면 이런 배구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했던 일이 새삼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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