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에는 두 가지 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다. 하나는 1년치 날짜가 월별로 인쇄된 한 장짜리 달력, 또 하나는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자 달력이었다. 한 장짜리 달력에는 음력 날짜, 24절기와 함께 각종 농사 관련 정보들이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일자 달력을 넘길 때마다 어른들은 "참 세월 빨리 간다"하셨다. 방금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고 곧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데는 일자 달력 만한 게 없었다. 일자 달력의 용도는 또 있었다. 얇은 습자지로 제작된 그 달력은 두루마리 휴지가 귀하던 시절, 화장실에서 사용하기에 그만이었다.
▦달력에는 시대의 변화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 1960~80년대 달력의 용도는 참 다양했다. 달력은 기업 광고나 사은품,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홍보물로 애용됐다. 학생들은 달력으로 교과서를 정성 들여 싸면서 새 학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달력에는 주로 대가들의 동양화나 풍경 사진, 유명 연예인 사진들이 담겼다. 90년대에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취향을 살린 맞춤형 달력이 나왔다. 자신과 가족들이 주인공이 되는 달력, 자신이 찍거나 그린 사진이나 그림 등으로 만든 달력, 기후 통계를 실은 기상환경 달력 등 개성 만점의 달력이 출현했다.
▦달력은 중요한 경기 지표였다. 달력은 주로 기업들이 제작하는 양이 많기 때문에 연말에 풀리는 달력 수량을 보면 경기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전자수첩, 휴대폰 등 달력 기능이 있는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자 기업들은 경기에 상관없이 달력 생산량을 크게 줄였다. 대신 고급화 전략을 택했다. 국내외 유명 작가의 판화 원판을 구입해 한정본으로 만든 달력, 명화나 명사진의 질감이 살아나도록 고급 종이를 사용한 달력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 판화나 그림을 오려 액자로 만들면 거실 장식용이나 선물용으로 그만이었다.
▦세밑이다. 휴대폰의 전화번호 저장 기능 덕분에 포켓용 수첩에 전화번호를 옮겨 적는 수고는 덜었지만 탁상 달력과 수첩에 각종 일정을 적는 일은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한해 동안 무얼 하며 지냈는지 1월부터 12월까지 탁상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 본다. 자리를 함께 했던 이들이나 모임 이름이 눈에 띈다. 큰 비밀은 아니지만 이걸 버리면 누가 보지나 않을까 조심스럽다. 새 탁상 달력을 놓으니 눈 앞에서 1년의 세월이 뭉텅 사라지고 새 1년이 성큼 다가서는 듯하다. 달력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도 기대와 희망으로 바꿔주는 신통력이 있나 보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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