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역대 일본 총리 가운데 이만큼 한국인이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름도 드물 것이다. 한일관계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무라야마 담화'의 주역이 그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이 독립한지 50년만인 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사죄를 표명했다. 담화에 포함된 반성의 구절들은 자민ㆍ사회당 연립정권에서 사회당 위원장으로 총리를 맡은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일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앞두고 무라야마 전 총리를 19일 도쿄(東京) 간다(神田)의 메이지(明治)대학 건물에서 만났다. 규슈(九州) 오이타(大分)에서 모교인 메이지대학 모임에 참석키 위해 도쿄에 들른 길이었다.
_하토야마(鳩山) 정부가 적극적인 아시아 외교를 표방하고 있다.
"아시아를 무시해서는 일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나와 논의되고 있는 단계이므로 그런 방향으로 눈을 돌려 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안전과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자세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_100년 전 한일강제병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시로서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100년 전 합병했지만 1945년 포츠담선언 이후 일본은 패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총리로서 1995년 8월 15일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안겼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해 앞으로는 이 같은 잘못을 되풀이 않겠으며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겠다는 지침을 냈다. 과거의 역사를 현실로 인정해 식민지 지배는 나빴다, 침략 전쟁은 잘못이었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_무라야마 담화의 정치ㆍ외교적인 의미는.
"담화가 나온 해는 전쟁이 끝나고 꼭 50년째 되는 해였다. 당시에는 역사인식에 대해서도 이른바 일치된 (일본의)국론이 없었다. '그 전쟁은 식민지해방전쟁이다. 전쟁을 통해 모든 식민지가 해방되지 않았나. 유럽이 아시아를 쳐들어와서 식민지화하는 것을 막고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전쟁을 높이 평가하는 역사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은 잘못이었다. 아시아인들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안겼다. 이런 일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관을 내각의 의견으로 결정해서 정부의 방침으로 낸 것이다. 처음으로 일본 국내의 역사관을 통일했다는 데 매우 큰 의미가 있다."
_담화 발표 당시 저항은 없었나.
"마음 속으로는 반대한 사람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장일치로 각의가 정했다는 것은 그만한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납득했다고 본다. 다만 일본은 사상, 언론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방침에 반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_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 아시아 외교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담화가 아시아 외교의 기본이 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민주당 정권을 포함해 담화 발표 이후의 모든 정권이 이 방침을 계승하고 있다. 고이즈미 전 총리 등이 야스쿠니에 참배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역사교과서 문제 등도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은)잘못이었다고 내각은 말하고 있고 역사교과서도 기준을 정해서 수정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나 전쟁을 합리화하는)그런 의견이 아직 있지만 나라를 움직일만한 큰 힘은 아니다. 대다수는 담화를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_한일 관계가 좋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독도영유권은 어떻게 접근해가야 좋은가.
"영토문제는 어려운 문제다. 다케시마(竹島ㆍ독도의 일본명)는 권리를 다투고 싸우기보다 일본과 한국이 어떻게 하면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 하는 시각으로 함께 성의를 갖고 이야기를 해나가면 어떤 형태로든 합의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다케시마라는 섬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어업권 문제가 있지만 이것을 한국에도 이익이 되고 일본에도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성의를 갖고 논의해 나가면 합의점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해주기를 바란다."
_우익 역사교과서 문제도 때만 되면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장애물이다.
"역사교과서 문제는 검정의 단계에서 잘못을 수정해 나갈 수 있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법이고 또 그런 (우익)교과서가 나와도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그것을 채택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은 채택률이 낮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직 시민들의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시민의 힘이 중요하다."
_하토야마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추도시설 설립 검토를 밝혔는데.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법인으로 존재해야 하지만 전쟁을 높이 평가해서 전의를 고양하기 위해 야스쿠니가 공헌했다는 역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문제를 없애기 위해 새로운 형태로 위령할 수 있도록, 당파와 종파를 넘어서 세계의 모든 사람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부터 검토해 온 것이지만 실현이 쉽지 않았다. 간단히 성사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방향으로 검토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_한일 양국의 문화, 청소년 교류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오부치 당시 총리와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정치로서는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를 지향하자, 함께 협력해 나가자는 의미의 선언을 했다. 문화 개방, 교류도 개선했다. 그 이후로 영화, 음악 등 여러 문화 분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런 것을 통해 양국이 이해의 폭을 넓혀 왔다. 그런 교류가 일한관계에 매우 큰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만큼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고쳐 나가는 노력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_양국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가.
"경제는 (외교문제와 특별히)관계없이 교류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교류해서 상호 우정을 쌓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세대들이 미래를 걸머지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의 문제이다. (양국이)사이가 좋아져서 서로 소중한 관계가 돼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 이익이면 일본에도 이익이고, 일본에 이익이면 한국에도 이익인 그런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일한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을, 아시아 전체를 포함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_최근에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이제는 정치가가 아니니까 정당 활동을 정식으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전쟁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 평화헌법만은, 특히 헌법 9조는 지켜야 한다는 활동을 하고 있다. 헌법 개정은 결국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 문제를 자각해 헌법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마지막 남은 일로 생각하고 있다. 여러 단체가 있어서 거기에 협력하고 있다."
_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일본 전 총리로서 한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100년이 지나는 동안 좋지 않은 시기도 있었고 한국인의 의지를 무시해서 식민지 지배를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를 청산해 나가면서, 단순히 잊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청산을 해서 손 잡아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100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상처를 치유해 나가려는 노력을 진심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고 하는 일본인의 노력을 정당히 평가해 주어서 서로 힘을 합쳐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면 좋겠다."
8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말투는 또박또박했다. 건강의 비결을 물었다. 웃으며 그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하면 무엇이든 자기가 움직여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도 써야 하고, 손발도 써야 하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사치스런 것은 못 먹으니까 생선이나 야채에 소식(小食)을 하게 된다." 징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마지막 총리 무라야마의 '평화주의'는 '가난'이라는 정신적 가치와도 맥이 닿아 있었다.
■ 무라야마 전 총리 약력
▦1924년 오이타(大分)시의 어부 집안에서 출생
▦1946년 메이지(明治)대학 정치경제학과 졸업
▦1963년 오이타현의원 당선(사회당)
▦1972년 중의원 당선(사회당), 이후 8선
▦1993년 사회당 위원장
▦1994년 총리
▦1996년 사민당 당수
▦2000년 정계 은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이사장
인터뷰=글ㆍ사진 김범수 도쿄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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