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9시 서울 강동구 암사동 주택가. 쌀쌀한 주말 아침의 적막을 깨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낡은 다세대주택 반지하집 문을 두드렸다. 집수리 봉사단 '해뜨는 집' 회원 7명이었다. "할머니, 집 고치러 왔습니다!"
김귀순(78ㆍ가명)씨가 문을 열자 텁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지에 검은 곰팡이꽃이 무성한 방, 먼지에 찌든 싱크대가 절반을 차지하는 비좁은 거실, 타일은커녕 칠조차 안된 흙벽 화장실. 할머니 혼자 사는 5평 남짓한 집을 일별하더니 선재승(39)씨가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오늘도 만만찮은 작업이 되겠네요."
봉사단은 방에 있는 세간부터 꺼냈다. 도배를 위해서다. 세간이라곤 색 바랜 이불과 옷 몇 벌이 든 옷장과 이 빠진 그릇 몇 점이 전부다. 옷장 뒤로 곰팡이로 새까만 벽이 드러났다.
"잠깐, 잠깐만요, 사진부터 찍고요. 그래야 있다가 짐 정리 할 때 편하죠." 일순에 작업을 멈추게 한 이는 초등학교 6학년 심동섭(11)군.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집수리 봉사 경력이 벌써 6년째인 고참이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동섭이를 보며 아버지 심상덕(44)씨가 웃는다. "첫 봉사 때부터 아들과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보통 애들은 힘들다고 투정할 텐데 동섭이는 뭐가 재밌는지 나보다 더 열심이에요."
같은 시간, 인근 천호동의 독거노인 집 두 곳과 상일동의 저소득 가정에서도 해뜨는 집 회원들의 봉사가 진행됐다. 지역자치 활성화 운동 모임인 열린사회시민연합 산하 서울 지역 8개 시민회에 결성된 해뜨는 집은 1999년부터 어려운 이웃들의 주거환경 개선 활동을 펴고 있다. 강동송파시민회는 2003년부터 참여해 이날까지 63회째 집수리 봉사에 나섰다.
도배 작업은 김현철(45)씨가 이끌었다. 출판사 사장님이지만 초창기부터 집수리 봉사에 참여해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낸다. 김씨는 이날 처음 봉사에 참여한 여대생 심정은(23)씨와 고교생 안성호(18)군에게 도배용 풀을 물에 개는 법을 가르쳤다.
큼직한 대야에 데운 물을 붓고 시범을 보이던 그는 "몇 년 전 같이 도배풀 개다 눈맞은 대학생 커플이 있다"며 농을 던졌다. 두 초심자는 못들은 척, 일에만 몰두했다.
또 다른 초심자 오형주(18)군은 봉사 3년차 선재승씨의 도배지 재단을 거들었다. 신중하게 도배지를 자르는 선씨 옆에서 종이를 잡아주며 오군도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몸으로 하는 봉사라 피곤한 만큼 보람이 크고, 노력의 결실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전기공사 일을 하는 이상대(48)씨는 현관등을 달았다. 할머니가 밤에 현관 출입을 하다가 다칠까 염려해서다.
집주인 김귀순씨는 쉬지 않고 뜨거운 커피를 대접했다. 찻잔을 건네기 무섭게 "그건 식었응께 언능 이걸로 새로 마셔봐잉~" 하며 새 잔을 내놨다. 기관지가 좋지 않은 김씨는 5년 전 식도암 수술까지 받았다.
봉사단은 그런 김씨를 위해 구석구석 쌓인 먼지 제거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김씨는 아들, 손자 같은 이들이 찾아온 게 더 반가운 눈치다. 하나 있는 딸이 지방에 살아 왕래가 뜸하다 보니, 손님이라곤 한 달에 한 번 오는 보건소 의료진이 전부다.
오후 4시30분, 7시간여 만에 작업이 끝났다. 방은 연베이지색 꽃무늬 벽지로 화사해졌고 창문 주위로 스티로폼을 둘러 외풍을 막았다. 싱크대는 때를 벗고 다시 반짝였고, 냉장고 안도 깨끗이 정리됐다.
흰색 페인트 칠로 말끔해진 화장실 벽까지 둘러본 할머니는 "하루 만에 이렇게 환해지니 꼭 남의 집에 온 거 같다. 마음도 밝아지는 것 같다"며 일곱 사람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봉사자들의 표정도 밝았다. 선재승씨는 "회사 업무에 치여 살며 좀체 웃을 일이 없는데 봉사 활동을 하며 웃음이 늘었다"고 했다. 심정은씨는 "사실 학점 받으려 시작한 일인데 막상 깔끔해진 집을 보니 성취감에 뿌듯하다"고 말했다. 사랑의 집수리공들은 내년 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골목으로 흩어졌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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