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복개되기 전 경복궁에서 미대사관 뒤편 쪽으로 이어지는 길에 개울이 있었다. 청계천 지류인 이 물길은 중학동 지명을 따 중학천으로 불렸다. 그 개천가, 지금의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공원 맞은 편쯤에 아주 작은 교회가 있었다. 서울 한복판이었어도 다들 별 수없이 남루했던 1960년 전후, 교회 한번 안 가본 동네꼬마들도 크리스마스면 이 교회에 갔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아마 사탕 몇 알이나 연필 한 자루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릴 적 성탄절, 그리고 교회에 대한 첫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베풀고 나누는 따스함 같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를 갖지 못한 탓에 이후 교회(천주교회를 포함해) 이미지는 대개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맥락 속에서 생성되고 바뀌었다. 아마 대부분의 비종교인, 또는 타종교인들도 그럴 것이다. 작고 따뜻한 교회는 언젠가부터 어마어마하게 크고 범접치 못할 위용을 지닌 대성전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러기까지 필경 나누고 베풀기보다는 받고 거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나마 권위주의 시절 억압받는 이들을 거두어 품은 몇몇 성직자들의 고매한 모습에서 어릴 적 느낌을 되살려낼 수 있을 뿐이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교회 이미지는 점점 세속의 정치집단, 혹은 투쟁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돼버렸다. 주요 정치사회적 현안마다 교계가 나서는 것이 당연한 듯 돼버린 때문이다. 사제들이 비장한 성명을 내거나 거리로 나선 기억을 얼추 되짚어봐도 4대강, 미디어법, 전교조교사 징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용산 참사, 북핵, 미국산 쇠고기수입 및 촛불시위, 한미FTA 등 거의 모든 이슈를 포괄한다. 한 쪽에서 보수성향의 목사들은 또 그들대로 정권과 정책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높이다 못해 세종시안 수정을 옹호하는 정치광고까지 내기에 이르렀다.
▦과거의 공을 인정하더라도 지금에까지 온갖 사회적 이해와 갈등마다 교회가 나서야 할 상황은 아니다. 그 일이 이 땅에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기보다는 도리어 적대와 미움을 키우는 데 일조하는 건 아닌지. 어릴 적 그 작은 교회에서 처음 배웠던 소박하고 예쁜 캐럴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맑고 따뜻해진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울린다/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탄일종이 울린다…' 이제 교회는 영혼을 정화하고 구원을 돕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좋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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