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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을 돕다니…" 뿌듯한 쪽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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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을 돕다니…" 뿌듯한 쪽방촌

입력
2009.12.24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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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인천 동구 만석동의 사단법인 인천내일을여는집 쪽방상담소. 허름한 2층짜리 건물 2층에 세든 상담소 안 '괭이부리말 희망일터'에서 할머니 8명이 둘러 앉아 부지런히 노란색 종이를 접고 있었다. 고단한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검고 뭉툭한 손들이 종이를 접고 자른 뒤 테이프를 붙일 때마다 그럴듯한 쇼핑백들이 탄생했다.

간간이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고, 완성된 쇼핑백은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할머니들이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 달을 꼬박 일해 손에 쥐는 돈은 1인당 10만원이 조금 못된다. 굳이 계산하자면 쇼핑백 하나에 50원 꼴이다.

김재순(83·여)씨는 이곳에서 2년째 쇼핑백을 만들고 있다. 1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그는 30년 넘게 만석동의 쪽방에서 살고 있다. 당뇨병 등을 앓아 몸도 성치 않은데, 자녀들이 있어 기초생활수급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김씨는 얼마 전 월 수입의 10분의 1이 넘는 '거금' 1만원을 최근 쪽방상담소에 마련된 불우이웃돕기 모금함에 넣었다. "늘 남을 돕고는 싶었지만 보다시피 줄 것이 없어서 주지 못했어요." 그는 그 나눔 때문에 연말연시를 더 빠듯하게 지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내가 조금 덜 쓰면 되지. 약값 빼고는 돈 쓸 데도 거의 없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창작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무대로 잘 알려진 만석동 쪽방촌은 인천에서도 가장 낙후한 동네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이들이 하나 둘 모여 형성된 쪽방촌은 아직도 그때 모습 그대로다. 어른 한 명이 지나가도 처마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좁은 길 양쪽으로 200여개 쪽방이 얼기설기 들어서 있다.

이곳은 머물다 떠나는 여느 쪽방들과는 다르다. 주거용 쪽방이라 가족들이 사는 집도 있고, 길게는 40년 이상 거주하는 주민들도 있다. 나무판자 한 장이 대문을 대신하고, 비닐 한 장이 사나운 겨울 바람을 막는다.

쪽방들에는 화장실이 없다. 쪽방촌 어귀의 공용화장실이 주민 580여명의 대소변을 받는다. 빨래 널 공간이 없어 맑은 날에는 이 집 저 집 내놓은 빨래건조대가 빈 터를 차지한다.

쪽방촌 주민들은 대부분 70, 80대 독거노인들이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희망일터에서 쇼핑백을 만들거나 집에서 마늘을 깐다. 더러는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기도 한다.

항상 약자였고, 도움을 받는 쪽이었지 주기는 힘들었다. 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쪽방촌 주민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에는 한 푼 두 푼 모은 성금으로 더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느낀 뿌듯함이 어려있다.

쪽방촌에서 성금 모금을 시작한 것은 성탄절을 앞둔 지난해 이맘때였다. 쪽방상담소를 중심으로 "우리도 남을 돕자"는 의견이 모였고, 쪽방촌 주민들과 더불어 인천내일을여는집이 운영하는 노숙자쉼터의 노숙인, 무료급식소 이용 노인들이 없는 주머니를 털어 모금함을 채웠다.

이렇게 모은 87만1,610원을 지난해 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고, 이 소식을 들은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쪽방상담소 앞으로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눔의 기쁨을 경험한 쪽방촌 주민들은 올해도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9일부터 진행된 모금에는 만석동을 비롯해 동구 송림동과 중구 인현동 쪽방 등에서 180가구 이상이 참여했다.

노숙인과 무료급식소에서 성금을 낸 이들도 100명 가까이 된다. 무료급식소에 들렀다가 모금함에 650원을 넣은 70대 남성은 "얼마 안 돼 부끄럽지만 이게 내 전 재산"이라고 했고, 한 기초생활수급자는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가기도 했다.

박종숙 쪽방상담소 소장은 "하루 용돈이 1,000원인 노인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이라고 내민 650원에 가슴이 뭉클했다"며 "어렵게 살면서도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과 같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희망일터에서 만난 구옥자(70·여)씨도 쇼핑백 접어 받은 돈 중 일부를 기꺼이 성금으로 냈다. 안면마비로 한쪽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든 그에게는 쇼핑백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다.

구씨는 "지난해 성금을 내고 누군가를 돕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금액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데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쪽방상담소는 올해 모인 성금을 2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사랑의열매회관에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한다. 전달식에는 쪽방촌 주민대표와 노숙인 대표, 무료급식소 이용자 등이 함께 할 예정이다.

올해는 쪽방상담소 직원들도 참여해 지난해 모금액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내일을여는집 상임이사인 이준모 목사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어려운 이들의 사정을 더 잘 이해한다는 말이 쨈?것 같다"며 "이분들의 정성이 우리 사회 '사랑의 온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김창훈 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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