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현실을 뒤늦게 따라간다." 연극 연출가 김철리씨가 사석에서 한 말이다. 현실을 인지하고 대본을 쓰면, 공연이 올라갈 즈음엔 상황이 한참 흐른 뒤라는 것이다. 뮤지컬 무대에도 이제서야 '88만원 세대'가 등장했다.
소설가 김영하씨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퀴즈쇼'는 88만원 세대의 뮤지컬이다. 내용도 그렇지만, 1980년대 태어난 전수양씨가 대본을 쓰고 같은 세대 배우 이율이 주인공을 맡아 자신들의 처지를 그대로 읊는다.
학점 4.0, 토익 900점에 어학 연수까지 다녀온 스물 일곱 살 이민수는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의 죽음 후 취업 전선에 내몰린다. 무대 위 젊은이들은 십자가처럼 사다리를 하나씩 짊어지고 있다. 그들은 취업의 도구를 상징하는 사다리를 열심히 타면서 엄청난 스펙을 외쳐대지만 돌아오는 것은 '탈락'이다.
연방 "왜 일자리는 없는 거야"를 노래하는 무리에 이민수가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그는 우아하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채팅남의 권유에 따라 의문의 퀴즈 회사에 취직한다. 까만 무대에 쏜 채팅 영상 뒤에서 인물들은 허공에서 그네를 타고 있다. 사이버 세계를 그럴듯하게 형상화한 장면이다.
반면 현실과 격리된 공간으로 설정된 퀴즈쇼는 너무도 익숙한 장면을 연출한다. 숱한 TV 퀴즈쇼와 다를 바 없다. 여기에 반복되는 퀴즈 문답은 지루함을 더한다. '정답'이라는 대사와 가사는 무려 140여회나 나온다. 오답을 말해야 상금을 더 받게 돼있는 퀴즈쇼 결승에서 민수는"세상이 원하는 답이 진짜 정답"이라는 규칙을 뒤엎고 정답을 말한다. "돈에 얽매여 멍청하게 사는 인생이 싫다"는 청년다운 이유로 말이다.
시종 우중충한 무대와 웃음을 배제한 대본, 코를 푸다 만 듯한 결말. 어느 것 하나 흥미롭진 않다. 뮤지컬 평론가 조용신씨는 "제작비 일부를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받았기에 가능한 실험"이라고 정리했다. 큰 비용을 들인 대극장 공연과 로맨틱 코미디로 승부하는 소극장 공연으로 양분된 뮤지컬 시장에서 드문 중극장 뮤지컬인 점과, 스타 캐스팅이 난무하는 이 때 이름보다 실력으로 배우를 가려낸 것도 바람직한 시도다.
"청춘은 질문을 던지는 시간/ 청춘은 문제를 만드는 시간"이라는 삽입곡 가사처럼 '퀴즈쇼'는 쏟아지는 창작 뮤지컬에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제시하는, 뮤지컬의 '청춘'같은 작품이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1월 2일까지 공연한다. 1588-7890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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