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새벽 4시 20분 서울 영등포역 근처 한 만화방 2층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던 50대 일용직 근로자 B씨는 어디선가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전날 밤 피곤에 절어 안전화만 벗어놓고 흙먼지가 잔뜩 묻은 검은색 잠바와 갈색 바지 차림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누운 채로 담배 두 대를 연거푸 태웠다. 그래도 졸음이 가시지 않는 듯 1층으로 내려가 100원짜리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신 후 서둘러 만화방을 나섰다. 시계는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하 8도의 추운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 숨도 쉬기 힘들었지만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영등포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인력시장. 이미 10여명이 길거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건물 5층에 있는 인력사무소로 올라갔다. 여기도 7명이 먼저 와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로 청소나 공사장 곰방일(벽돌 나르는 일)을 하는 B씨는 "재기해서 제대로 살고 싶지만 돈을 모을 방법이 없다"며 하소연했다. 보통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그가 받는 돈은 청소의 경우 6만5,000원 정도. 하지만 알선 수수료(10%)를 떼어주고 나면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6만원이 채 안 된다. 공사장에 나가면 7만2,000원(수수료 제외)을 받을 수 있지만 힘들어서 꾸준히 할 수 없다는 게 B씨의 말이다.
B씨는 "인건비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데 돈이 모일 리가 있나"고 혀를 찼다. 이때 B씨와 안면이 있는 40대 C(만화방 거주 3년차)씨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게 다 조선족 같은 중국인이 한국에 많이 들어와서 인력시장에서 일하니까 인건비가 안 오르는 거죠, 뭐. 한 달 내내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5만8,500원 받아서는 사실 생활이 안되지."
한국도시연구소가 서울역, 영등포역, 대전역, 대구역 인근 비주택 거주자 207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월 평균 소득은 59만6,000원이다. 특히 비교적 젊은 '워킹 홈리스'(working homeless)가 몰려 있는 만화방, PC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업소 거주자의 월평균 소득은 43만 2,000원에 그쳤다. 이는 보건복지부가 정한 올해 1인 가족 최저생계비(49만845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돈을 모아 미래를 도모하기는커녕 당장 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처음부터 인력시장에서 하루살이 인생을 산 것은 아니다. 이날 비슷한 시간 서울 북창동 인력시장에서 만난 최모(41)씨는 "20대 초반부터 중국집 요리사로 일했고 돈을 모아 번듯한 중국집 사장으로 산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2002년 주식투자로 가진 돈을 모두 잃은 후 부모 형제와 인연을 끊고 찜질방, 쪽방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털어놓았다.
주로 중국집 주방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는 최씨는 "운이 좋아 한 달 꼬박 일하면 210만원을 버는데 그건 쉽지가 않다"면서 "이젠 나이도 들고 일도 힘에 부쳐 내 삶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솔직히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를 악물고 재기를 결심했다고 해도 열악한 거주환경과 고된 노동으로 인해 망가진 건강이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같은 곳에서 만난 신모(54)씨는 중국집에서 요리를 배우다 스물 두 살 때 중동 건설현장으로 건너갔다. 돈을 더 벌어서 당시 사귀던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후유증(간질병)만 얻어왔다. 귀국했지만 취직이 안됐다.
이후 20년 넘게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그는 7년 전 재기를 꿈꾸며 중국집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꿈을 접은 상태다. 신씨는 "중국집 일은 12~13시간 일하고 5만~7만원을 받는데 공사장보다 더 힘들고 식사도 열악하다"면서 "이젠 골병이 들어 한 달에 겨우 엿새 일하고 50만원 버는데 그걸로 방값, 생활비 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했다. "7년 쪽방 인생 이러다 끝나는 거지, 나아지긴 뭘 나아져." 그는 자조하듯 말하며 자리를 떴다.
오랜 워킹 홈리스 생활로 남는 건 결국 고장 난 몸과 빚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얘기였다. 용산 쪽방촌에서 20년 넘게 살았다는 최모(52)씨는 "공공근로와 일용직으로 겨우 먹고 살았는데 왼쪽 어깨에 종양이 생겨 지난 8월부터 일을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딸에게 매달 보내던 10만원도 못 보냈고 내 병원비도 없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도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부채규모가 1,000만원이 넘는 비주택 거주자는 27%가 넘고, 1억원이 넘는 경우도 4%나 됐다. '부채가 얼마인지 모른다'는 이도 20%가 넘었다.
한국도시연구소 서종균 박사는 "소득도 없고 빚에 시달리다 보면 뻔히 알면서도 명의도용 등의 금융사기를 당해 자살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들에 대한 금융 및 심리치료 상담 등 다각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준모기자 moonjm@hk.co.kr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10명중 6명 공공부조 혜택 못 받아
비주택 시설에서 거주하는 '워킹 홈리스'는 열악한 주거ㆍ생활환경과 고된 노동으로 각종 만성질환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상당수가 기초생활수급 혜택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한국도시연구소가 비주택 거주민 207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관절염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59명(28.6%)로 가장 많았으며 상당수가 고혈압(27.7%), 위장병(17.5%), 당뇨병(16.5%), 피부질환(13.1%) 등을 겪고 있었다. 암환자는 4명(6.8%)이었으며 정신질환자도 14명(6.8%)이나 됐다.
특히 만화방 다방 PC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업소의 경우 환기나 채광이 거의 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다 보니 피부질환 발생 비율이 23.1%로 비주택 시설 거주자 평균의 2배에 달했다.
하지만 만성질환은 대부분 장애로 판정되기 어려워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최저 생계비가 지원되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는 장애인, 6개월 이상 치료를 요하는 환자, 65세 이상 고령자 등에만 한정된다.
조사대상 207명 중 80명만이 기초생활 수급자였고 공공근로나 자활센터를 통해 일하며 혜택을 받는 조건부 수급자는 6명으로, 응답자의 41.5%만이 공공부조 혜택을 받고 있었다. 특히 비교적 나이가 젊은 워킹 홈리스들이 몰리는 만화방 등 다중이용업소 거주자 가운데 기초생활수급자는 한 명도 없었다.
비수급자들의 상당수는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기초생활수급자 보다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비수급자 116명 중 월평균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사람이 60명(51.7%)으로 절반을 넘었다. 빈곤의 수렁에 빠져 있는 이들에겐 아예 몸이 망가져 장애인이 되거나 나이가 들어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는 것이 그나마 소득을 높이는 길인 셈이다.
복지기관 등에서 사회복지서비스를 받는 경우도 쪽방 거주자가 89.4%로 가장 높은 반면 고시원 거주자는 26.2%에 그쳤고, 취업 관련 지원을 받은 비율도 고시원(31.0%), 쪽방(27.7%)은 상대적으로 높았으나 만화방 다방 PC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업소는 11.5%에 머물러 시설별로 차이가 컸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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