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 산업은 올해 최대 성적을 거뒀다. 현대ㆍ기아차가 글로벌5에 진입함으로써 세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한국경제의 상징처럼 평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올해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경쟁업체들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이달 독일 폴크스바겐이 일본 스즈키의 지분을, 프랑스 푸조시트로앵이 미쓰비시 지분을 인수하면서 세계 자동차 산업은 급변하고 있다.
내년에는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과 북미 시장에서 현대ㆍ기아차가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에 최근 세계 자동차 업계의 변동 요인, 위협적인 요소를 짚어 보고, 국내 자동차 산업이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상ㆍ하로 나눠 모색해 보기로 한다.
#9일 국내 완성차 자동차 업체와 부품업체 관계자 200여명이 강남의 모 호텔에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행사를 열었다. 세계 경기 침체 속에 약진했다며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행사 말미, 이날 참석한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이 “올해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이룬 성과는 놀라움 그 자체다. 내년에 더 좋은 성과를 낳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건배를 제의하자 행사장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오후 일본과 미국의 주요 외신은 한 장의 사진과 함께 긴급 뉴스를 타전했다. 사진은 마르틴 빈테르코른 폴크스바겐 회장이 스즈키 오사무 스즈키 회장의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세계 3위의 자동차 업체 독일 폴크스바겐이 세계 9위 일본 스즈키의 지분을 인수, 순식간에 도요타와 GM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세계 1위 자동차 업체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뒤 이어 푸조의 미쓰비시 인수 등 굵직한 인수합병 소식이 세계 자동차 업계를 강타했다.
세계자동차 업계가 살아남기 위해 짝짓기에 나서면서 “현대ㆍ기아차는 완전히 포위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 사상 최대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국내 자동차업계에는 벌써부터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라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적자와 구조조정으로 자존심을 구긴 선진 자동차업체들이 내년부터 진검승부를 펼칠 것으로 보여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업체간 짝짓기는 규모와 기술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과거 단순한 몸집 불리기식 인수합병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평가다. 그만큼 현대ㆍ기아차가 넘어 설 벽이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유럽'자본'+일본 '기술', 미국 빅3->빅1
반격의 선두 주자는 유럽과 일본 업체다.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도 견실한 성적을 낸 유럽업체들이 잇따라 소형차와 전기차 기술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일본 업체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스즈키의 지분 20%를 인수 최대주주가 되면서, 스즈키의 소형차 제조 경쟁력을 고스란히 얻을 수 있게 됐다.
스즈키는 1,000㏄급 자동차가 내수의 70~80%를 차지하는 인도시장에서 판매 1위(점유율 약50%)를 유지하는 등 소형차 부문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로써 폴크스바겐은 앞으로 인도시장뿐 아니라 역시 소형차 비중이 높은 브라질에서도 선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 바람에 올해 인도 내수시장 2위를 굳히고 내년 브라질 공장 착공에 들어가는 현대차는 힘에 벅찬 상대를 만나게 됐다.
프랑스 푸조시트로앵(PSA)도 일본 미쓰비시의 지분 50% 인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푸조는 미쓰비시의 전기차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인수에 나선 것이다. 미쓰비시는 과거 제휴를 맺었던 포드와의 관계를 곧 정리할 계획이다.
또 다른 일본 업체인 마쓰다 역시 기존의 포드 대신 독일 다임러그룹이나 일본의 도요타와 제휴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규모의 경쟁에서 탈락한 마쓰다와 소형차 부분을 강화하려는 다임러 그룹이 손을 잡을 경우, 세계 자동차 업계에는 또 하나의 강자가 등장할 전망이다.
미국 빅3도 합종연횡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탈리아 피아트가 크라이슬러 경영권을 인수, 플랫폼을 공유하기로 했다. 피아트는 소형차 라인을 강화 중국, 브라질 시장을 노릴 심산이다. 일부에서는 GM이 턴어라운드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포드와 손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하고 있다. 현실화할 경우 미국의 빅3는 100년 만에 빅1으로 단일화 된다.
중국, 인도 업체도 세계 시장 도전
신흥시장에서는 압축 성장을 이룬 중국 업체들이 무섭게 움직이고 있다. 18일 중국 지리차는 춘절연휴(2월14일 시작) 전에 볼보를 인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수가격은 18억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로서 중국 지리차는 후진업체라는 딱지를 떼고 단숨에 브랜드 가치를 끌어 올릴 수 있게 됐다.
欖?이달 초 상하이차는 GM과 공통투자, 인도에 소형차 생산을 위해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상하이차는 수 년 안에 인도에서 20만대 수준을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올해 20만대 판매 수준인 현대차인도법인과 일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편, 인도의 타타차도 고급 브랜드인 재규어 인수를 추진 중이다.
갈 길 급한 현대ㆍ기아차
현대ㆍ기아차는 최근 업체간 짝짓기로 선진업체와 후발업체로부터 완전히 포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환경에서 현대ㆍ기아차가 살아남으려면 일단 규모 면에서 500만대 이상의 판매가 가능해야 한다.
현대ㆍ기아차는 지난해 420만대에 이어 올해 465만대 판매가 예상된다. 하지만 이정도 판매로는 규모 면에서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규모의 경제에서 성공해야 재투자가 이뤄질 수 있는 자동차 산업의 특성과 최근의 인수합병 움직임을 볼 때 전문가들은 내년에 현대ㆍ기아차가 최소 500만대 이상을 판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현대ㆍ기아차는 올해 성공에 도취되기 보다 내년의 외롭고도 힘든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 품질·가격·신뢰 3박자 국내 부품업체엔 기회
올해 신차를 내놓은 독일의 세계적 프리미엄급 완성차 업체는 한 자동차 마니아로부터 지청구를 들었다."중국산 부품을 쓰더니 신모델 승차감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 업체 관계자는 "최근 경제위기 때문에 일부 차량에 중국산 부품이 사용됐지만 일부 소모품에 한정된 것이며 앞으로 최소화할 것"이라고 해명을 하면서 진땀을 뺐다.
이 관계자는 "글로벌 경제 위기로 선진업체들이 값싼 부품만 찾았으나 최근에는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세계 자동차 산업 재편은 국내 부품업계에는 오히려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소형차로 신흥 시장의 문을 열려는 완성차 업체에게 신뢰도, 질, 가격 경쟁력을 갖춘 부품회사는 생존 차원에서 '필수불가결'한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일부 소모품을 제외하고 아직 중국은 경쟁 상대가 아니다. 최근 유수의 완성차 업체들이 국내 부품회사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 대표적인 부품업체는 현대모비스. 현대모비스는 가격 경쟁력, 질, 친환경미래차 기술 등 완성차 업체가 필요로 하는 3박자를 고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월에는 BMW, GM등과 9,000만달러(약1,000억원)규모의 램프와 제동장치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앞서 9월에도 미국 크라이슬러와 20억달러 규모의 섀시모듈 공급 계약을, 봄에는 독일 다임러와 오디오, 램프 부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 회사가 강점을 갖는 부분은 모듈(부품 덩어리). 완성차업체 입장에서는 모듈 형태로 납품 받을 경우 개별 부품을 받아 조립할 때와 비교해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선호도가 높다.
현대모비스는 과거 부품을 모아 놓은 단순 모듈에서 최근에는 운전석 모듈에 전동식 조향장치를 결합하거나 섀시 모듈에 에어서스펜션을 결합하는 등 핵심기술을 더한 첨단 모듈로 사업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기술은 떨어지지만 가격으로 승부를 하려는 경쟁업체들을 따돌리겠다는 계산이다.
현대ㆍ기아차라는 안정적인 매출처를 확보하고 있는 데다 최근 세계 유수 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국제적 인지도 역시 급상승하고 있다. 내년 이 회사는 브라질과 중국 공장 착공에 들어가 해외 진출에 나서는 한편 해외 수주팀을 가동, 선진 완성차 업체와의 계약 성사에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또 하반기에는 LG화학과 손을 잡고 친환경 리튬이온 배터리팩 생산에 들어간다. 경기 의왕공장에 들어설 합작사는 연산 20만대 규모의 리튬이온 배터리팩을 생산할 계획이어서 부품회사로서 현대모비스의 위상은 한층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품업계 2위 업체인 현대위아도 늘어나는 해외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해외진출을 검토 중이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최근 각 자동차 업체마다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해 주요 부품을 세계 각지에서 조달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품질 대비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한국 부품은 업체간 경쟁이 치열해 질 수록 오히려 러브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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