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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외톨이 집 밖으로 '희망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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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외톨이 집 밖으로 '희망의 행진'

입력
2009.12.2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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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가명ㆍ16)군은 넉 달 전까지만 해도 2년 동안 한 번도 집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자퇴한 후 어두컴컴한 다세대주택 지하 골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인터넷 게임에 몰두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화장실을 가기 위해 현관 문턱을 넘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선수로 뛰었는데 중 1때 전학하며 새로 만난 감독과 불화를 빚은 것이 발단이었다. 하루 이틀 학교를 빼먹다 아예 집에 틀어박혔지만 식당 일 나가는 어머니와 월 70만원 받는 피자 배달로 생계를 꾸려가는 아버지는 하루하루 살기도 버거워 그런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민준이는 부모가 일하러 나간 뒤에야 부엌에서 먹을 것을 챙겨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숨어살던 민준이가 넉 달 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난달부터는 매일 신문 배달을 하고 검정고시학원에도 다닌다. 세상을 향한 제2의 걸음마를 시작한 민준이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학원을 오가는 일이 아직 버겁지만 "나중에 체육선생님 하려면 견뎌야지요"라고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지난 11일 저녁 서울 용산역 앞 광장. 칼바람을 맞으며 서성이는 민준이에게 누군가 다가와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민준이를 세상 밖으로 이끈 상담교사 정윤도(39)씨였다. 민준이는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몇 주 안 봤다고 또 낯을 가리네. 섭섭하다, 섭섭해." 정씨의 장난기 어린 타박에 민준이는 그제서야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입가에 어린 미소에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5월. 은둔의 늪에 빠진 아들을 못다 못한 아버지가 서울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에 전화해 "아들을 제발 집 밖으로 나오게만 해달라"고 애원했다. 새내기 상담교사 정씨가 호기롭게 민준이를 맡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민준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민준이 방은 잡동사니들과 담배꽁초로 가득해 신발을 벗고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 같은 곳에 민준이가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참담하더군요."

꽁꽁 닫혔던 민준이의 마음을 두드린 것은 역시 운동이었다. 학창시절 핸드볼 선수였던 정씨가 먼저 운동 얘기를 꺼내자 민준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씨는 조용히 '작전'에 돌입했다. 야구공과 글러브를 선물하고 일부러 야구경기를 중계하는 TV를 틀어놓고 혼자 소리 높여 응원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형처럼 대해주는 정씨의 정성이 통했던 걸까. "예" "아니오"밖에 모르던 민준이의 말수가 차츰 늘어났다. 만난 지 3개월째인 지난 8월 어느 날, 정씨가 "산책 나가자"고 한마디 던지자 민준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2년 만의 외출이었다. 정씨가 당시 느꼈던 기쁨에 대해 흥분해 말하자, 민준이는 쑥스러웠는지 "그냥 더워서 나갔다"며 괜히 무안을 줬다.

민준이는 그 후 몰라보게 달라졌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외출이 점점 잦아졌고, 동네 한 바퀴 돌던 것이 한강변까지 넓어졌다. 정씨의 권유로 신문 배달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꿈도 생겼다.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학교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아 검정고시를 택했어요." 민준이가 새 생활에 잘 적응하자 공식 상담활동을 마쳤지만 정씨는 종종 안부를 챙기며 홀로서기를 응원하고 있다.

민준이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사는 10대 은둔형 외톨이는 꾸준히 늘고 있다. 서울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만 해도 이와 관련한 상담 사례가 지난해 15건에서 올해 35건으로 늘었다.

현선미 팀장은 "청소년이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집단 따돌림, 학교 폭력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고 말했다.

정윤도 교사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사는 18세 여자아이를 상담한 적이 있는데,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언어능력이 유치원생 수준이었다"며 "마치 늑대소년을 보는 듯 했다"고 말했다.

10대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10만명 이상의 청소년이 사회적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둔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청소년상담원이 2005년 고등학생 1,46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등교를 거부하고 집에 머문 경험이 있고 친구가 없다고 응답한 '고위험군'이 0.3%였고, 잠재적 위험군도 9%에 달했다.

청소년상담원은 이런 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일정 자격을 갖춘 이들을 '청소년 동반자'로 지정해 '찾아가는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전국 76개 청소년상담지원센터에서 1,300여명이 동반자로 활동한다.

한 달 만에 처음 만난 정씨와 민준이의 대화는 찻집에서 저녁식사 자리까지 이어졌다. 성탄절엔 민준이가 제일 가보고 싶다는 63빌딩에 함께 가자는 약속도 했다. 민준이는 이날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내 말했다.

"사실 (방에 틀어박혀 살 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누군가 나를 밖으로 꺼내주길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넉 달 전 자신과 같은 처지의 또래 친구들에게도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를 바라는 기도처럼 들렸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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