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행복할까? 의문이 들었다.
종국엔 도살당해 인간의 식탁으로 떠밀리는, 낳는 족족 알을 빼앗기는 녀석들의 처지가 동족과 다르지 않을진대 '행복한 돼지와 닭'이란 조어(造語)가 낯설었던 탓이다. 성장과 효율이라는 우선순위에 밀려 인간의 복지도 갈수록 오그라드는 마당에 하물며 '동물복지'라니.
"동물답게 살고 싶다"는 축생의 외침을 동물복지로 실현하고 있다는 농장 두 곳을 찾았다. 동물복지는 식물의 유기농법마냥 가축사육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단다.
행복하게 자란 돼지와 닭
#충북 단양군 적성면의 단양유기농원은 '무(無)항생제 돼지농장'(전국 7,000곳 중 현재 30곳 정도 인증) 국내 1호다.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동물복지 농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기브랜드도 '행복하게 자란 돼지'(CJ돈돈팜)다.
복지의 핵심은 운동장. 아니 축사를 운동장이라 부른다. 돼지들은 융단처럼 깔린 왕겨를 밟고 32m 길이를 내키는 대로 오간다. 겨울 볕에 누워 단잠을 자는가 하면 줄에 매단 타이어를 가지고 노는 녀석도 있다.
항생제는 구경 못하고 목초니 씨앗이니 몸에 좋다는 것만 먹는다. 운동을 많이 해 살이 더디 붙는 바람에 일반농장의 돼지(생후 180일 정도면 110㎏이 돼 도살)보다 30일을 더 산다. 상팔자가 따로 없다.
이곳(2,000㎡)의 두당 거주면적은 1.56㎡, 농림수산식품부의 사육기준(0.6㎡)보다 세배 가까이 넓다. 3,000마리 이상 키울 수 있는 공간에 1,200마리 남짓만 키우는 셈. 생산성을 따지면 그만큼 손해라는 얘기다.
집이 넓다(인간은 추구하지만)고 행복이 담보되는 건 아닐 터. 중요한 건 인간이나 돼지나 심리상태다. 돼지를 관리하는 곽용구 CJ돈돈팜 팀장은 "자유(환경선택권)와 안정이 육질을 결정하는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했다.
본디 돼지는 스트레스와 계급투쟁이 심한 동물. 서열이 정해질 때까지 물어뜯고 싸운다. 생산성 극대화를 위해 좁은 철제칸막이(스톨)에 가둔 밀집사육 돼지는 종일 시멘트바닥 위에 서서 먹고 싸고 제가 눈 똥을 뒤집어쓴다.
청결한 천성이 훼손돼 짜증이 나고 이는 옆자리 약한 동족에 대한 해코지로 이어진다. 이를 막을 요량으로 마취 없이 송곳니와 꼬리를 자르는 곳도 있다.
반면 동물복지의 혜택을 누리는 돼지들은 날 때부터 서열이 정해진 무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다툴 일도 없고, 다툰다 해도 멀찌감치 피하면 된다.
밀집사육 돼지들은 사람이 들어오면 학대의 기억 때문에 슬슬 피하는데, 이곳 돼지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사람을 깨무는 것도 호기심이 많은 천성을 그대로 간직한 덕이다.
#돼지농장에서 40분 거리의 단양군 영춘면 용소농장은 동물복지 인증 달걀을 생산한다. 자연 그대로 키워 자연스러운 교미를 통해 알을 낳는다(유정란)고 해서 브랜드는 '자연란'(풀무원)이다.
아파트공장형태의 철망우리(케이지) 양계장과 달리 비닐하우스 몇 채가 고즈넉이 누워있다. 이곳도 넓은 거주면적(평당 15마리, 케이지는 78마리)과 생활의 자유가 복지의 첫 자리다. 닭들은 저마다 느린 걸음으로 노닐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현미식초 등 주인이 먹어보고 괜찮은 것만 얻어먹는다. 케이지에 갇혀 목만 내민 채 모이를 탐하는 녀석들과는 눈빛이 다르다.
그러나 불행한 주인들?
박명종(44) 용소농장 대표의 낯빛은 어두웠다. 단가는 케이지 달걀의 2배 이상이지만 생산성이 3분의 1수준에 그쳐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했다.
종일 불을 밝혀 산란을 강압하는 케이지와 달리 자연광에 의존해 산란율이 떨어지고, 환경 따라 껍질의 색깔과 맛도 제 각각이기 때문. 더구나 노동은 열 배가 더 든다.
그는 "온갖 친환경 인증은 다 받았을 정도로 국내 최고의 계란을 생산한다는 자부심이 버팀목이지 닭이 편한 만큼 사람은 힘들다"고 했다.
값이 비싸다고 혹은 조금만 껍질 색깔이 달라도 손사래를 치는 소비자들이 야속하다. 인공이 아닌 자연상태로 공들여 키우다 보니 빚어진 일인데도 말이다.
강유성(63) 단양유기농원 사장의 고민도 비슷했다. "가둬 기른 맛(부드럽고 물렁물렁)에 길들여져 옛날 우리에서 두세 마리 키우던 시절의 진짜 돼지고기 맛을 질기다고 타박하는 게 속상하다"는 것. 동물복지 돼지는 뒷맛(後味)이 산뜻 고소하고 비계가 쫄깃쫄깃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실 동물복지 제품은 비싸다. "판매가는 15%정도 비싸지만 원가는 30%이상 차이가 나는 점을 헤아려 달라"(강 사장), "사료값이 너무 올라 겨우 적자를 면한다"(박 대표)는 답이 돌아왔다.
희망은 있다. 문주석 이마트 축산 바이어는 "물량이 적어 성수점과 역삼점에서만 (행복돼지를) 팔고 있는데, 고가(일반 삼겹살보다 100g당 260원 비쌈)지만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과 독특한 맛 때문에 마니아가 늘고 있다"고 했다. 자연란을 선보인 풀무원도 동물복지를 한우 젖소 육계(肉鷄) 등으로 넓혀가고 있다.
동물복지는 안전한 먹거리를 바라는 인간욕망이 질기게 스며든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동물이 정말 행복할까'라는 의문은 우문(愚問)이었던 셈이다.
◆동물복지
동물(한우 젖소 육계 산란계 등 식용)의 사육ㆍ관리 전 과정에 있어 위생과 복지를 고려한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 자유롭게 생활하게 하고 질병의 위험과 고통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일련의 활동. 동물의 행복이 안전한 먹거리를 이끈다는 인식이 토대.
국내에선 풀무원이 2007년 처음 도입했고, 스웨덴 영국 등 유럽에선 15~20년 전부터 동물복지 인증상품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 한ㆍ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단양=글ㆍ사진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