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마음속 응어리' 책 읽고 토론하며 풀죠/ 독서치료, 새로운 심리 치유법으로 각광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마음속 응어리' 책 읽고 토론하며 풀죠/ 독서치료, 새로운 심리 치유법으로 각광

입력
2009.12.22 00:34
0 0

김민서(48ㆍ가명)씨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중학교 국어교사 직도 그만두고 낯선 타향에 신접살림을 차린 직후부터 남편은 외도를 일삼았고 출장을 핑계로 연락을 끊기 일쑤였다. 급기야 이혼까지 요구했다.

김씨는 외동딸의 장래를 염려해 이혼을 거부했으나 배신감과 좌절감 때문에 자살을 시도할 만큼 괴로움을 겪었다. 고민 끝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마음을 살피기보단 약물 위주의 처방만 내리는 데 실망해 두 번 만에 그만뒀다.

인터넷 검색 중 '독서치료'라는 낯선 단어가 김씨의 눈에 들어왔다. 평소 독서를 좋아했던 김씨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2002년 봄 서울 종로구 한국독서치료학회를 찾았다. 첫 상담에서 독서치료사는 김씨에게 '갑옷 속에 갇힌 기사'란 책을 권했다. 늘 최고가 되려고 용맹하게 싸워온 기사가 갑옷을 벗지 못해 절망한다는 어른용 동화였다.

김씨는 일곱 번이나 책을 찢었다. 그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 속속들이 들춰지는 기분에 차마 책을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가족들을 위한다며, 그들의 바람을 못 본 체하고 끝내 갑옷을 벗지 않았던 미련한 기사가 바로 내 모습이었어요. 갑옷에 갇혀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몰랐던 기사와 내 자신이 불쌍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눈물은 감정의 정화와 깨달음을 줬다. 김씨는 주저하던 이혼을 선택했고, 조각과 공예를 배워 전시회를 여는 등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다. "올해로 8년째 독서치료를 받으면서 삶이란 한 편의 책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장을 넘기기 전엔 아무도 모를 일이죠. 그간의 불행이 오히려 제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 같습니다."

심리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독서치료가 새로운 심리 치유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로도 불리는 독서치료는 1차 대전 이후 구미에서 참전 군인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 기법으로 도입돼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됐다.

국내엔 60년대 후반 학문적 차원에서 소개됐다가 2000년대 들어 심리치료 기법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독서치료학회, 한국심성교육개발원 등 민간 단체와 대학 평생교육원 등에서 독서치료 전문가를 배출하고 있다.

지난 9일 한국독서치료학회에서 열린 독서치료 집단상담 시간. 김현희(56) 열린사이버대 예술상담학과 교수가 참가자 10명에게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게'를 소리내어 읽게 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소감을 묻는 김 교수의 질문에 박경희(35ㆍ가명)씨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구절이 가장 뭉클하다"고 답했다.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해 상당 기간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박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매주 한 번씩 독서치료를 받으며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남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나 봐요. 지난해 이 시를 처음 읽고 상담을 받으며 외로움을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려 애썼습니다." 장금란(39)씨는 "예전엔 강해지기 위해 외로움을 이기려 애썼는데 문득 시인의 말처럼 스스로를 그렇게 옥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외로움을 인정하니 삶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독서치료 참가자 중엔 가정 문제로 고민하는 주부,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많다. 선입견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도 많이 찾는다. 독서치료엔 문학 작품이나 자기 계발서가 자주 쓰인다.

예컨대 우울증 주부에겐 '그 남자가 원하는 여자, 그 여자가 원하는 남자'(김성묵) '30년 만의 휴식'(이무석), 따돌림을 겪는 청소년에겐 '내 곰인형이 되어 줄래?'(미하엘 엔데)가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런 책엔 인간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찰과 사유가 담겨 있기 마련"이라며 "성찰이 부족한 채로 심리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문제를 극복할 단서와 의지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독서치료 전문가 이병훈씨는 "영국에선 우울증 초기 환자에게 자기 계발서가 처방되고 독일에선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등 유럽에서 독서치료가 임상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증하는 노인 우울증을 막고 웰다잉(well-dyingㆍ생을 잘 마감하는 일)을 돕는데도 독서치료가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독서치료사 이동희(38)씨는 2006년 성북구의 한 복지관에서 만났던 할머니와의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당시 68세였던 그녀는 5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뒤 처지를 비관하며 공격적 성향을 보였고, 이씨와 상담할 때도 줄곧 젊고 건강했던 과거 얘기만 했다.

이씨는 할머니에게 동화 '오른발 왼발'(토미 드 파올라)을 읽어줬다. 손자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던 할아버지가 병들어 손자의 도움을 받아 걷는다는 내용으로, '늙음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일주일 뒤 만난 할머니는 이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몸이 예전처럼 돌아가야 행복할 거라고만 생각했어. 이젠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 책 읽고 나서 오랜 만에 침 맞으러 다녀왔다우."

강성명 기자 sm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