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 '불통'의 인문학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불통'의 인문학

입력
2009.12.22 00:34
0 0

2008년 1, 2월은 무척 바빴다. 영문학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존 밀턴(1608~1674)의 탄생 400주년을 맞아 <밀턴 평전> 출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평생 권력에 굴하지 않고 깨끗한 지조를 지킨 밀턴의 고결한 삶을 모국어로 널리 알리는 것이 밀턴을 공부한 인문학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소통은 인문학의 본질

평전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1999년 밀턴의 대표 산문 <아레오파기티카> 의 완역·주석·연구서를 출간한 무렵이었다. 그 후 9년 동안 몇 편의 글을 써서 밀턴 생애의 주요 대목들을 정리했다.

강에 다리 놓는 걸로 치면 큼직한 돌들로 징검다리를 놓은 셈이다. 제대로 된 다리를 만들려면 징검다리 사이의 빈틈을 채워야 했다. 나름대로 빈틈을 메운 초고를 완성해서 출판사에 넘겼지만 노련한 편집자가 송곳처럼 '구멍'을 찾아냈다. 바야흐로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시점에서 수많은 허점을 확인하자 다급해졌다. 곧 방학이 끝나니 작업 기한은 2월말까지였다.

마음이 조급한 이유는 또 있었다. 미국 등지에서 밀턴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쟁쟁한 영문학 교수가 수십 명이다. 밀턴 탄생 4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에 한국 최초의 밀턴 평전을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영예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어몰입 국가'아닌가. 영어를 이토록 사랑하는 국민이라면 밀턴에 열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다. 이건 '돈도 되는'책이었다. 엄청난 착각이었지만.

서둘렀지만 원고를 넘긴 것은 3월 말이었다. 편집·인쇄에 두 달이 더 걸렸다. 마침내 5월 하순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최초의 400주년 기념 <밀턴 평전> 을 펴낸 것이다. 안도했다. 두 번째 평전이 언제 나올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2009년이 저물도록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마라톤 코스 42.195km를 허겁지겁 완주했더니 출전 선수는 한 사람뿐이더라는 식이다. 허전한 독주였다.

인문학 교수들이 독서 대중을 겨냥한 저서 출간에 무관심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학계가 저서보다 논문에 인센티브를 훨씬 더 많이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대학들이 저서를 몇 권씩 내도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구점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연구비 역시 철저히 논문 위주로 지급되고 있다. 논문 한 편에 연구비를 2,000만 원까지 받을 수 있지만, 인문학 저서 한 권의 인세 수입은 고작해야 10분의 1 수준이다. 게다가 저서 한 권 쓸 시간과 노력이면 논문 5, 6편은 족히 쓸 수 있으니, 경제논리로 따지면 책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제도와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 교수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일까? 커트 스펠마이어는 <인문학의 즐거움> 에서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 삶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통'이 인문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문학 교수가 정녕 '독립적 지식인'이라면, 제도와 현실이 어떻든 독자에게 다가서려는 소통의 노력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일상적 삶에 다가서야

곧 크리스마스다.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은 절대자가 지극히 낮은 곳에 임한 사건이다. 지극히 거룩한 분이 소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광장, 아고라를 누비며 시민들을 찾아 다닌 것도 소통을 위해서였다. 의학과 달리 인문학은 고객에게 직접 서비스를 파는 대신 대학의 관료주의적 구조에 의존해 생존을 영위하고 있다. 문제는 인위적 제도에 기대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것이다. 2009년 대한민국은 '불통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우리 인문학 역시 소통에 목마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