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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길 위의 이야기] 봄 또한 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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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길 위의 이야기] 봄 또한 멀지 않으리

입력
2009.12.2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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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밀은 봄에 파종하고 가을에 수확을 한다. 병충해가 극성을 부리는 여름을 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약을 칠 수밖에 없다. 반면 우리밀은 가을에 파종해서 겨울을 나고 봄에 수확을 한다. 당연히 농약을 칠 필요가 없어진다. 냉기로 발도 디딜 수 없는 집에 서서 오들오들 떨면서 한겨울 땅 속에 있을 우리밀 생각을 했다.

지금쯤 얼어붙은 땅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발아를 준비하고 있을 밀들…. 봄과 가을도 없어지고 겨울도 겨울 같지 않고. 겨울 같지 않은 겨울 날씨에 익숙해 있다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당분간 봄처럼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겠지, 외출하면서 난방 스위치를 아예 꺼둔 것이 화근이었다. 며칠 집을 비운 사이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급강하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발을 내딛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파트 구석구석이 냉골이다.

개켜놓은 이불 위로 올라가 온기가 돌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났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본 누군가의 상자 집. 유명 메이커의 대형 텔레비전 포장 상자였다. 신문지가 몇 겹이나 깔려 있었다. 신혼집처럼 깨끗하던 상자집. 보일러 광고와 구세군 냄비에서 생각이 흘러 멈춘 것이 내년 봄 푸르게 피어오를 우리밀이었다. 병충해도 견딜 수 없는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자라는 것들이 있다. 새벽녘에야 겨우 온기가 돌았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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