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대 초, 독일 언론이 독일과 영국의 인프라(Infrastructure) 수준을 비교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2차 대전 후 사회기반시설 재건과 확장에 힘을 쏟았으나 영국에 아직 뒤진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영국은 런던에 집중된 공습 피해에도 불구하고 대영제국 전성기부터 축적한 도로 교량 철도 항만 등의 인프라가 온전하다. 이에 비해 독일은 경제 기적의 큰 몫을 투자했지만 영국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업과 수출입 등을 위한 인프라 의존도가 특히 높은 처지에서 미래 경쟁력을 걱정하고 있었다.
■ 그 몇 해 전, 영국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느릿느릿한 캠핑 카 행렬이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반면 독일 아우토반은 대형 화물트레일러들이 겁나게 질주하고, 주변 곳곳에 건축용 타워크레인이 솟구친 모습에 압도될 정도였다. 경제의 활력이 달랐다. 그런데 인프라가 뒤진다니 언뜻 의아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낙후했다는 웨일스 지방을 차로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도로 교량 하천 제방 등 인프라를 거의 같은 모습으로 갖춘 데 감탄한 생각이 났다. 우리 읍 크기의 마을 입구마다 공회당 도서관 등은 물론 체육관 아이스링크를 안내하는 이정표 푯말까지 똑같았다.
■ 그 즈음 동구 사회주의체제의 실패를 상징한 것이 퇴락한 인프라다. 실제 유럽을 다녀보면 서유럽도 형편에 따라 차이가 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앞선 듯하지만,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이른바 강소국은 기반시설과 시골 주택까지 윤기가 흘렀다. 반면 이탈리아는 녹슨 가드레일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시절 등장한 '국가경쟁력 비교'에서 인프라가 윤택한 유럽 강소국은 경쟁력도 앞섰다. 90년 대 중반 이후 미국이 경쟁력 선두에 오른 것은 다분히 금융경제의 힘이다.
■ 진보성향의 미 브루킹스 연구소는 오랜 전부터 인프라 연구 세미나를 계속하고 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에서 드러난 낙후한 하천 관리체계와 도로 항만 송전망 등을 시급히 개선하지 않으면 경쟁력과 삶의 질까지 뒤질 것이라는 우려가 바탕이다. 오바마 정부가 인프라를 정비하는'삽질 준비(Shovel-ready)'프로젝트에 세금을 쏟아 붓는 것은 단순히 경기회복 정책이 아니다. 브루킹스의 연구보고서는"인프라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이슈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인프라 삽질을 보수의 악덕이라고 마냥 욕하는 우리사회의 자칭 진보 지식인들은 유럽과 미국의 경험을 바로 봐야 한다. 삽질이 진보일 수 있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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