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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진의 미디어 비평] 개인 공포에 편승한 한국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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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진의 미디어 비평] 개인 공포에 편승한 한국 언론

입력
2009.12.2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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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라는 책을 쓴 엄기호의 경험으로부터 올해 마지막 칼럼을 정리하려 한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교육에 종사하면서 과거의 교육법(페다고지)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는 학생들이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행동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곧 저항에 부딪쳤다. 학생들은 부조리하거나 불평등한 상황을 아예 외면했다. 비판적 의식, 분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그는 그들이 왜 비판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지 이유를 따져 봤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학생들은 비참하고 부조리하며 불공평한 상황을 보며 분노보다는 공포를 느낀다. '저렇게 되어선 안 되지'가 아니라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런 상황에 들지 않으려고 매진한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 비참한 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자본으로 바꾸고자 최선을 다한다. 어릴 때부터 경쟁과 성공의 습속에 익숙한 그들 세대에게 비판이나 분노는 이미 물 건너간 이야기다.

공포 안에서 학생들은 개인의 실패를 개인 탓으로만 간주하는 체념도 익힌다.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쫓겨나도 개인이 잘못한 결과로 여긴다. 개인을 지켜줄 장치에 대한 믿음이 없는 탓이다. 자기자신만이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될 뿐이다. 쌍용차의 비극이 적절한 예다. 쫓겨난 것은 개인이 잘못해서이고, 남은 것은 자신을 지키는 능력 덕분이라고 받아들일 뿐이다. 개인은 사회적 비용까지 떠안는 고단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개인은 수치심을 갖게 된다. '루저'로 낙인 찍힌 자들은 은둔한다. 숨어든 개인은 위로받을 장치를 구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의 시례를 자신의 성공인 양 받아들이며 위무한다. 영웅을 쫓는 심리가 널리 퍼진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 사회 대신 성공한 개인을 기둥 삼아 자신을 격려하며 또 다른 멋진 영웅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국가는 성공하고 개별적 영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현대 정치의 순리다. 보편적 의지와 이성을 가진 국가가 특수 의지를 가진 영웅을 대신하는 것이 보편적 역사 전개다. 공포의 정서에 빠져들고, 은둔하는 이가 늘고,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가 짙어지는 상황은 근대의 역주행일 수밖에 없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그 역주행을 비판하고 고민해야 할 사회 내 이성적 장치들도 오히려 그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 이건희 IOC 위원을 사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며칠 사이에 거세지고 있다. 벌써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것처럼 말하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지자체가 나서고, 재계가 북을 치고, 언론이 추임새를 넣고 있다. 영웅이 나타나 국가 이익을 고스란히 챙겨오고 국민들이 그에 환호하는 서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보편적 의지와 이성을 가진 국가는 실종된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말고 각자 스스로를 위해 살아야 하는 엄혹한 시절이 슬프다. 비참해진 개인을 돌보아줄 존재로 영웅을 기다리는 심리는 더욱 슬프다. 사회 내 이성적 장치가 그런 모습에 편승하고 부추길 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루저'가 되고 말 것이라 생각하면 슬픔은 공포로 변한다. 젊은이만 매일 공포와 더불어 사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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