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에 겐자부로 지음ㆍ박유하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248쪽ㆍ9,500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72)가 등단 50년을 기념해 2007년 발표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는 문제적이다. 아름다운>
일본 사회에 드리워져 있는 제국주의 유산의 청산을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품어왔던 그가 패전 직후 미군 점령기에 일본인들이 느꼈던 굴욕감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영귀축'운운했던 제국주의자들의 후예가 아니라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으로부터 '피지배자로서의 일본인들의 경험'을 듣는 기분은 좀 기묘하다.
그러나 '우리도 피해자이기 때문에 힘을 키워 이런 굴욕을 다시는 당하지 말자'는 식의 논리로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윤리의식이 깔려 있다.
너그럽게 말하면 이 소설은 역사의 정당성이라는 거대 담론에 압도돼 소리를 내지 못했던 개인의 피해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상처와 극복과 치료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노년의 작가 자신이다. 소설은 화자가 영화 프로듀서가 된 대학 동창과 함께 왕년의 아역 영화 스타와 함께 민중 봉기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 출연을 자원한 사쿠라는 전후 일본의 '내상'을 상징하는 인물. 전쟁 고아인 그는 패전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 후견인의 보살핌을 받다가 그 후견인과 결혼해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는데, 늘 어떤 고통에 짓눌려 있다.
화자는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여성이 주도해 일어났던 민중 봉기에 관한 옛이야기를 사쿠라에게 들려주는데 그녀는 농민 봉기 자체보다 봉기에 뛰어든 여성상에 이상할 만큼 집착한다.
사쿠라가 불굴의 저항심을 지닌 민담 속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유는 '나는 점령군의 성 노리개가 아니었다'는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에 저항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민담 속 여주인공과 패전 직후 점령군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해야 했던 일본 여성들의 희생을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의 이미지에 포개어 긴박감 넘치게 전개하는 작가의 솜씨는 빈틈이 없다.
정치적 해석을 경계하자면 소설은 여성으로 대표되는 역사의 희생자, 약자, 비주류의 고통을 인류애적으로 공감하고 위무하자는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풍요로운 해석의 결은 좋은 문학작품의 미덕이다.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된 노 작가의 정신적 곤궁을 다루고 있는'노년소설'이면서 고통을 위무하는 예술로서 문학과 영화의 의미를 묻는 '예술가 소설'이기도 하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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