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떠나는 여행 취재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고속도로 위다.
일직선의 무미건조한 그 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목적지를 가장 빨리 연결시켜 주니 타지 않을 수 없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야 구비구비 잇는 지방도나 국도를 타며 우리 산천의 풍경을 한껏 만끽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빠듯한 일정이다.
재미 없고 지루할 것만 같은 고속도로지만 몇몇 구간에선 눈이 부실 만큼의 아름다운 풍광이 뿜어져 나온다.
강원 강릉시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향할 때 첩첩의 산자락 위로 떨어지는 빨간 석양이 그중 하나고, 서울 방향의 중부고속도로가 충북 진천군을 스칠 때 오른쪽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농다리도 운전하는 내내 기대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되는 곳은 영동고속도로가 경기 여주군를 스칠 때다. 남한강교와 섬강교를 지날 때면 널찍하고 평화로운 강 풍경이 차창 밖으로 살짝 지나친다.
강바닥에 안개라도 깔린 날이면 선경이 따로 없다. 일반 도로처럼 차를 세울 수가 없으니 짧은 순간 스칠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아쉬워했던 그 찰나의 풍경 속으로 몸을 밀어 넣기로 했다. 강변의 평화로운 모래톱으로 발을 내딛고 직접 풍경과 하나가 되기로 했다.
남한강은 여주군을 스칠 때 여강(驪江)이란 이름을 얻는다. 한강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자존심이 담뿍 담겨 있는 이름이다. 일제에 의해 철도가 뚫리기 전까지 중요한 물자 수송로는 수운, 즉 강물이었다.
이곳은 한양으로 짐들을 싣고 가는 배들이 몰려들던 수륙 교통의 요지였다. 언제나 사람과 풍성한 물자로 흥청거렸던 이곳도 철도와 고속도로의 등장에 점점 잊혀져 갔다. 하지만 무심히 강물만 흐르던 이곳에 최근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고 있다. 여강의 아름다움을 좇아 생태 탐방에 나선 트레커들이다.
문화 단체 강길은 이들을 위해 3개 코스, 총 55km에 이르는 여강길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강과 내내 함께 하며 여강에 얽힌 전설과 옛이야기를 품고 있는 길이다.
이번에 걷기로 한 곳은 여강길 3코스의 일부 구간이다. 3코스의 시작점은 남한강과 섬강이 합수되는 곳에 있는 흥원창이다. 고려와 조선 때 남한강 물길에서 매우 중요시됐던 창고가 있었던 장소다. 당시 세금으로 거뒀던 조곡을 보관했다고 한다. 강변에 있었다던 창고는 보이지 않고 그 터였다는 안내판만 남아 있다.
섬강 건너편엔 붉은빛의 산자락이 층층이 쌓인 자산이 길게 누워 있다. 자산을 마주 보며 섬강을 거슬러 올랐다. 모래사장이 드러난 강줄기를 보면 머리 속에 그려 놓은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소월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에 살자'던 그 강변의 풍경이 이러했을 것이다.
아스라한 연무가 휘감은 첩첩의 산자락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로 스며들었다. 부드러운 강물결처럼 살짝살짝 휘어진 강길을 따라 걷는다. 물처럼 걷는 길이다.
강길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는 섬강교에는 신ㆍ구 고속도로가 나란히 붙어 있다. 1971년 개통된 옛 고속도로는 왕복 2차로다.
옛길은 바로 옆에 큼직하게 뚫린 새 고속도로가 94년 개통된 이후 여강길 탐방객이나 인근 주민들만 사용하는 한적한 길이 되고 말았다.
섬강교를 건너 자산을 뒤로 돌아들면 닷둔리 해돋이산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추수가 끝난 빈 들녘을 지난 길은 수북한 낙엽이 쌓인 오솔길로 이어진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여강의 물길이 보였다.
물길 가운데 모래톱에서 노닐던 겨울 철새들의 군무를 한다. 우아한 몸짓의 백조(큰고니) 10여 마리도 눈에 뜨였다. 인기척에 놀란 기러기떼는 정한 강물 위에 무수한 선을 긋고는 날아올랐다.
산길을 벗어나 만나는 곳은 강천마을이다. 이곳에서 계속 강길을 따라 걸으면 이웃마을인 굴암리에 이른다. 굴암리 앞엔 모래가 조금씩 쌓여 형성된 커다란 섬이 있다. 섬에는 포플러나 느티나무 등 키 큰 나무가 뻗어 올랐다.
이파리 없는 나뭇가지가 차가운 창공에 겨울을 그리고 있는 섬이다. 점심을 때울 요량으로 들린 굴암매운탕 주인에게 무슨 섬이냐 물었더니 따로 이름 없이 그냥 섬이라고만 부른단다.
이 섬은 사실 섬이 아니다. 섬과 마을 사이는 큰 물이 들면 강물이 흐르고, 물이 빠지면 늪이 된다. 다리가 없어도 섬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섬과 마을 사이의 늪을 일컫는 이름이 바위늪구비다.
자연 습지인 이곳엔 사람 키를 넘는 물억새가 빼곡하게 우거졌고 주먹만한 자갈이 깔려 포장도로처럼 길을 내고 있다. 돌 하나하나가 수석이 따로 없을 정도로 예쁜 무늬를 그리고 있다.
모래 사장엔 고라니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고 풀섶을 조금 건드리면 꿩이나 철새들이 후드득 날아오른다. 여강에서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 주는 곳이다. 이곳에선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된 단양쑥부쟁이도 발견됐鳴?한다.
바위늪구비에서 남한강교까지는 계속해서 강에 면한 습지를 걷는다. 여강의 고요한 겨울을 호젓하게 담는 길이다. 물억새 사이로 난 길은 중간중간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만 그리 걱정할 게 없다. 모든 길은 강과 나란히 이어진다. 그저 강물과 가까이 걷느냐, 조금 멀리 떨어져 걷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윽고 남한강교 아래에 이르렀다. 섬강교처럼 이곳도 신ㆍ구고속도로가 나란히 뻗고 있다. 차가 드물게 오가는 옛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발아래 펼쳐진 여강의 풍경. 고속도로를 쌩 하고 지나쳤을 때의 아쉬움을 한 번에 보상받기라도 하듯 오랫동안 멈춰 서서 그 전경을 눈으로 새겼다.
그림처럼 펼쳐진 이 강길이 조금 전 내가 지나온 길이였다니…. 나중 뒤돌아본 내 삶도 이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 여행수첩
여강길의 1코스는 나루터길로 불린다. 부라우 우만리 흔암리 등 옛 나루터의 흔적들을 좇는다. 영월루에서 시작해 아홉사리과거길 등을 거쳐 도리마을에서 끝난다. 15.4km
2코스는 세물머리길이다. 경기 강원 충청 삼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을 지난다. 모래톱이 예쁜 청미천과 부론마을 등이 포인트. 17.4km
흥원창에서 시작된 3코스는 남한강교를 거쳐 오감도토리마을 대순진리원 목아박물관 신륵사 등으로 이어진 뒤 조포나루까지 연결된다. 3코스의 총 길이는 22.2km. 기자가 답사했던 흥원창에서 굴암리 바위늪구비를 지나 남한강교까지는 약 10km다.
강길(blog.daum.net/rivertrail)은 매달 2, 4주 토요일 여강길 정기 답사를 진행한다. 코스는 수시로 변경된다. 단체는 미리 예약하면 평일에도 안내받을 수 있다. 개별 탐방할 경우 각 코스의 갈림길에 표시된 이정표나 파란색 리본을 따라가면 된다. 강길 (031)884_9089
국내 트레킹 전문 승우여행사는 흥원창에서 강천마을 바위늪구비 오감도토리마을로 이어지는 여강길 걷기 상품을 출시했다. 25, 26일 당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참가비 4만5,000원(점심 포함). 서울 광화문과 잠실서 출발한다. (02)720_8311
굴암리의 굴암매운탕(031_882_6382)은 푸짐한 여강의 맛을 선보인다. 다양한 민물고기가 푸짐히 차려지는 매운탕 맛이 훌륭하다. 쏘가리매운탕(4인 기준) 9만원, 잡고기탕 5만원, 동자개(빠가사리) 매운탕 4만5,000원이다.
여주군엔 오랜 역사만큼이나 돌아볼 곳이 많다. 신륵사, 세종대왕릉인 영릉, 명성황후 생가, 목아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천서리막국수촌도 여주의 맛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여주= 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