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건너온 지식, 당신의 서가를 잠식하다
"번역서 비중? 글쎄, 한 20%쯤?"(장재용ㆍ직장인) "읽고 싶은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홍수완ㆍ한신대 경제학과 강사) "번역서 말고는 읽을 게 없다. 심지어 황우석 사건에 관한 것도 독일인이 쓴 게 제일 낫더라."(최성일ㆍ출판평론가)
책과 가까이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번역 도서에 대한 체감 비중은 높다. 올해 출판시장이 낳은 숫자 가운데 일반인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단연 '100만'(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의 판매부수)일 것이다. 엄마를>
그러나 출판의 생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다 무겁게 다가온 수치는 '31%'(발행종수 기준 2008년 국내 출판도서 중 번역서 비중)일 듯.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하면 번역서의 비중은 훌쩍 더 커지는데, 한국인의 서가는 번역자의 탈초와 윤문을 거친 외국인의 목소리에 차츰 점령돼 가고 있다.
번역서 의존 갈수록 심화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대 중반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2000년 20%를 돌파한 후 꾸준히 확대, 2008년 드디어 30%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종수를 기준으로 한 단순 집계일 뿐이다. 판매량으로 따지면 학습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판 분야에서 번역서의 비중은 이미 50%를 넘어섰다는 것이 출판계의 중론이다.
특히 출판의 정수라 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의미있는 책은 십중팔구 번역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철학서의 경우 번역서 비중이 60%를 넘어섰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학문은 여전히 식민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돈다.
베스트셀러 목록도 마찬가지. 교보문고가 지난 15일 발표한 '2009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전체 종합 상위 30위(외국어학습서 제외) 가운데 번역서가 14권 포함돼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번역서가 범람하는 일차적 원인으로 "외국 저작물의 질적 비교우위"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출판계의 '단기 승부' 구조도 함께 지적했다.
▦상품성이나 판매량이 검증돼 최소한의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저렴한 번역비용으로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는 점 ▦저작권료 부담이 대체로 국내 인세나 원고료보다 저렴한 점 등이 그것이다.
결국 "사회의 지식ㆍ문화적 인프라 수준과 출판사들의 상업적 기동성이 결합, 출판 산업에 그대로 투영"돼 번역서 의존 심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 출판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766개 출판사 가운데 이전 3년(2004~2006년) 동안 번역 출판 경험이 있는 출판사는 55%에 달했고, 이들의 번역물 발행 비중은 46.2%였다. 번역 대상이 미국과 일본에 치중(2009년 67%)돼 있는 점과 저작권료의 급격한 상승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오염된 번역, 탁해지는 출판시장
번역서의 범람이라는 현상에 비해, 번역의 수준을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출판계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양보다 무분별한 번역이 해치고 있는 출판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서평 활동을 하는 이현우씨는 "번역의 질 자체는 태반이 '날림'"이라고 꼬집으며, 이를 유해 농산물에 빗대 '중국산 번역'이라 표현했다.
이씨는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이 더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듯, 독자도 품질 높은 번역서를 읽을 권리를 출판사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출판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에서 외국어 능력과 필력을 두루 갖춘 번역자는 양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정상급 번역자에게는 늘 1~2년씩 번역 물량이 몰려 있는데, 그들에게 번역을 맡기지 못할 경우 부실 번역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저작권 수입 비용이나 국내 저자의 인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번역료도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200자 원고지 1매당 3,000원 미만의 번역료를 받는 번역자의 비중이 3분의 1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꼭 필요한 분야의 책이 제때 번역돼 나올 수 있는 환경의 구축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자를 찾기 힘든 선진 담론을 소개하는 것이 번역 출판의 본래 의미. 그러나 기초학문 도서 등의 출간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거의 없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쟈넷 브라운 등의 훌륭한 다윈 관련 책들은 정작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 등 학계의 닫힌 현실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 지난해 아동·만화책이 53%나 차지
한국 작품의 해외 번역은'엄마를 부탁해' 15개국 진출 이례적
한국 도서가 외국어로 번역된 역사는 한 세기를 넘어섰지만 내용을 보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계약 건수도 적지만 분야, 진출 국가도 편중돼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집계한 2008년 국내 저작권의 해외 수출 현황 결과에 따르면, 총 계약 건수 365건 중 아동ㆍ만화, 실용ㆍ기타가 각각 195건(53%), 148건(41%)으로 90% 이상을 차지했다. 반면 문학과 학술 분야 도서는 각각 13건, 6건에 그쳤다.
이처럼 해외 진출 한국 도서는 그림책과 학습만화, 실용서가 주종을 이룬다. 그림책은 언어 장벽에 구애를 덜 받고, 학습만화는 외국에서는 드문 분야라는 데 이점이 있다. 수출 대상국은 중국 156건(42%), 태국 112건(31%), 프랑스 8건(2%), 미국 3건(0.8%) 등으로 아시아 지역 편중이 뚜렷하다.
최근에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바람 등과 관련해 국내 문학작품의 해외 소개가 전에 비해 활발해지고 있기는 하다. 주로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 등의 번역지원에 의존해 고은 시인의 경우 48종이 15개 언어로 번역됐거나 번역 중이고, 소설가 이문열, 이청준, 황석영씨의 작품 각각 50종, 36종, 35종이 외국에 진출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배수아, 김애란씨 등 젊은 작가들의 신작에 대해서도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올해의 경우 소설가 신경숙씨의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 가 영국, 미국, 노르웨이 등 15개국과 번역판권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는 기관의 지원 없이 출판사 독자적으로 이뤄낸 성과라 의미있는 것으로 꼽히기도 한다. 엄마를>
백원근 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 등으로 세계가 한국의 베스트셀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면서 "마케팅 측면에서의 정책적인 지원과 세계시장을 의식한 글쓰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한국출판문화상 역대 수상자 인터뷰/ '한국전쟁' 으로 47회 저술상 정병준 교수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발발 원인 및 과정을 두고 남침설,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이 있고 성격을 놓고는 내전, 국제전 그리고 내전으로 시작해 국제전으로 확대됐다는 주장 등이 있다. 전쟁을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른 것은, 한국전쟁과 관련해 풀어야 할 의문이 내년이면 발발 60주년이 되는 지금도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병준(44)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한국전쟁> (돌베개 발행)은 바로 그 같은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찾는 작업이다. 한국전쟁>
책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적 형태의 국제전'으로 규정한다.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인데 정 교수는 이를 "전쟁의 주요 동력은 내부 갈등이지만 그 궤도는 38선 분단 이후 미국과 소련이 마련해 놓았다"고 표현한다. 해방 후 미ㆍ소의 38선 설정과 한반도 분단, 양국의 점령정책 등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가 특히 강조한 것은 소련의 역할이다. 정 교수는 "당시 공산주의 세계가 스탈린 모르게 전쟁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며 "전쟁을 앞두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을 방문한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전쟁은 사실상 스탈린이 기획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소련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에서는 볼 수 없던 주장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은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념비적인 저작이지만 커밍스가 책을 쓰기 위해 열람, 인용한 자료는 구 소련이 1980년대 선별적으로 공개한 문서와 미국 자료, 영역된 일부 북한 자료였다. 한국전쟁의> 한국전쟁의>
반면 정 교수는 1990년대 초중반 공개된 자료를 일일이 살피고 책에 반영함으로써,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소련의 역할을 소홀히 다룬 커밍스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전쟁> 이 2007년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학술 부문)을 수상한 것은, 그렇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정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학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2001년,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그는 문서고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발굴, 열람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전쟁> 을 완성시킨 것은 특정한 이론이나 가설, 방법론이 아니라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그는 책을 쓴 동기를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도 이 분야에서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이 적어 아쉬웠다"고 밝히면서 "내 책이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것을 보면, 10년 후에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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