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말, 한 노(老)신사가 서울 서소문동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섰다. 조 변호사는 노신사의 명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었다. 양 전 회장은 85년 5공 정권에 의해 그룹이 강제 해체된 뒤 3년 동안 법에 호소해 기업을 되찾으려 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변호사들이 승산이 없다며 모두 사건 수임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양 전 회장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 망원동 수재민 국가상대 손해배상소송 사건 등을 통해 명성을 쌓아가던 조 변호사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터였다. 조 변호사는 흔쾌히 사건을 맡았다.
▦조 변호사는 사건 수임 후 호텔에 방을 얻어 전 국제그룹 직원들과 밤을 새워 가며 소장과 준비서면 작성에 몰두했다. 89년 2월 조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에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인한 재산권 침해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조 변호사는 심판정에서 숨가쁘게 기침을 하면서도 부당한 공권력 행사의 위헌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조 변호사는 90년 12월 폐암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와 절친했던 황인철 변호사가 변론의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그도 93년 1월 간암으로 숨졌다. 6개월 뒤 헌재는 국제그룹 해체를 결정한 일련의 공권력 행사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조 변호사의 국제그룹 사건 수임은 인권 변호사로서의 명성에 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 변호사는 그릇 크기가 달랐다. 그는 "공권력에 희생된 경우는 '누구라도' 법률의 구조를 받아야 하며, 그 공권력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며 소송을 진행했다. 조 변호사에게 양 전 회장은 재벌 기업인이 아니라 망원동 수재민이나 상봉동 진폐증 환자처럼 법의 구제가 필요한 약자에 불과했다. 조 변호사는 소장에 "권력형 부패로 국민경제가 농락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고 썼다. 권력 폭압의 원천 봉쇄와 피해 구제는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헌재가 3명의 변호사를 '올해의 모범 국선대리인'으로 선정해 14일 표창식을 가졌다. 모두 국민 생활과 직결된 법 규정의 기본권 침해 요소를 찾아내 위헌 결정을 받아 낸 변호사들이다. 박한 수임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사건을 맡아 자료 수집과 법 논리 개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 정성이 조 변호사를 떠올리게 한다. 마침 12일은 조 변호사의 19주기였다. 시대가 바뀌어 권력의 초법적 횡포는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법 정의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참 법조인'에 목마르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