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도 현장을 돌아다니며, 배관을 따라다니고 기계 설비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공장 효율이나 품질을 높일 수 있는 개선의 여지가 있나 샅샅이 훑어보는 거죠. 이젠 배관이나 설비가 머리에 훤합니다."
하루 84만배럴의 원유처리능력을 보유한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에서 에너지관리의 '달인'으로 손꼽히는 서일황(42) 에너지관리팀 과장. 지난 10년간 서 과장이 회사에 제안한 에너지 절감 관련 공정 개선 아이디어는 약 3,500건, 하루 1건꼴이다. 이 중 2,500건 정도가 회사에서 검토대상에 올랐다. 70%의 승률. 그가 낸 아이디어로 울산콤플렉스는 연간 20억원 넘게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서 과장도 10년 새 사내 '제안왕'(2001~2003년)을 석권하고, 대한민국신지식인(2003년)과 전국제안왕(2006년)에 오른 데 이어, 지난해에는 도전장을 낸 지 6년 만에 '품질명장'에 등극했다.
1990년 3월 SK에너지에 입사한 뒤 서 과장은 울산공장의 심장부라 할 동력파트에서 일해왔다. 여의도 3배 면적의 땅에 정유공장, 중질유분해공장, 석유화학공장, 폴리머공장이 모여있는 에너지단지인 울산콤플렉스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과 증기, 용수를 공급해주는 열병합발전소가 그의 일터. 3곳 동력공장이 보일러 15기와 발전기 9기를 돌려 시간당 1750톤의 증기와 13만4,000㎾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지금은 거미줄처럼 얽힌 증기, 물, 압축공기, 석유제품 등의 각종 배관과 동력 설비를 머리 속에 훤하게 꿰뚫고 있지만, 서 과장은 20년 전 입사 때만해도 백지상태였다.
서 과장은 애초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공고가 아닌 인문계를 다녔다. 하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집안 형편 때문에 스물두살때 대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결심했다.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던 유공(현 SK에너지) 입사를 위해선 직업훈련소 입시부터 치러야 했다.
화학 수학 영어 국어 교재를 붙들고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6개월 과정의 유공 직업훈련소를 졸업할 즈음,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훈련소 교관은 "사무직이 어울리는 것 같다"고 권했지만, 서 과장은 현장을 고집했다. 희망업무를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동력팀으로 채웠다. "공장을 인체에 비유해 '동력은 공장의 심장'이라고 하는데, 이왕이면 심장에 뛰어들어보자고 생각했죠."
혹독한 현장 수업이 시작됐다. 훈련소에서도 생산공정 전반에 필요한 기초지식을 배웠으나 이론수업이나 착실히 받았지, 실제로 동력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랐다. 입사 초기엔 작업표준도 없어서 선배들의 현장업무를 보조하면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공정을 파악해갔다.
도제식 현장교육이다보니 기계 밸브 돌리는 것도 사람마다 제각각이었다. 현장에서 구두 가르침을 받다가 선배한테 밸브로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 서 과장은 "신입 티를 벗기 위해 공장을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며 배관을 파악하고 기계설비에 대한 지식을 독학으로 익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나라도 제대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에너지 관리 및 공정 개선의 1인자로 떠오른 것은 공정개선 제안 활동을 본격화하면서부터. 의욕만있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서 과장은 2000년 제안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현장을 누비기 시작했고, 동력공장 설비도 먼지를 닦아가면서 설계구조, 개선 이력까지 파고들었다. 처음엔 복잡한 배관 사이로 사람 동선과는 상관없이 설치된 밸브의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서 과장의 대표작은 보일러에서 증기가 배출되는 방법을 개선해 산소에 섞여 대기 중으로 빠져나가는 증기를 모아 다시 활용하는 아이디어. 이를 위해 탈기기(물에 섞인 산소, 이산화탄소 등을 제거하는 장치)의 설계구조도 완벽하게 공부해야 했다. 보일러를 돌리기 위해 급수를 하면 물에 녹아있는 산소 때문에 배관이 부식되기 때문에 산소를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때 톤당 연간 3억5,000만원이나 하는 증기까지 산소에 섞여 같이 배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
"처음에는 증기를 가둬둘 생각만 하니 문제가 풀리질 않았는데, 장치의 구조를 공부하며 계속 궁리하다 보니 응축기를 부착해 배출되는 산소에서 증기만 따로 분리해 모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낸 뒤 2002년 현장에 적용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제안으로 연간 10억원 이상의 생산비 절감 효과를 거뒀다. 서 과장이 '품질명장'이라는 새로운 도전목표를 세운 것도 이때였다.
공정개선이 본격화한 2003년 이후 서 과장이 근무했던 동력1팀에서는 사고도 사라졌다. 서 과장은 "'사고만 내지않고 현상만 유지하면 되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는 선배들이 안이한 사고방식이 오히려 크고 작은 사고를 불렀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그는 "개선제안 활동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했다. 공정 개선 제안을 하면서 학업에대한 갈증도 느꼈다. 방송통신대(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한 뒤 작년에는 울산대 산업대학원에서 석사학위(산업경영공학 전공)도 받았다. 서 과장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올 초 동력1팀에서 에너지관리팀으로 옮기면서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됐기 때문. "동력공장에서 에너지 공정개선과 관련해 쌓은 경험과 전문지식을 활용해, 석유화학공장 등 다른 부문과의 유기적 관계까지 고려해 울산콤플렉스 전체로 에너지 효율 개선의 노력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울산=문향란기자 iami@hk.co.kr
■ SK에너지 지식경영… 품질명장 7명 배출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는 꾸준한 공정 개선 활동을 통해 '품질명장'을 배출해왔다.
품질명장은 생산현장에서 품질 개선과 관련해 투철한 장인정신을 발휘한 기술인력을 국가가 공인하는 제도. 10년 이상 현장에서 근무하고 품질 개선 관련 분임조 활동 경력이 5년이 넘는 사람을 대상으로 선발한다.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가 지금까지 배출한 품질명장은 모두 7명. 1호는 윤활유 캔과 무공해 극압 그리스 개발로 1996년 품질명장으로 선발된 박봉희 부장(현 생산기술관리팀). 정유공장 동력분야(1998년 정완수 부장, 2008년 서일황 과장), 합성수지 분야(2001년 송태율 부장), 교육프로그램 분야(2001년 허창호 부장), 석유제품 실험 분야(2002년 김호배 과장), 펌프 압축기 등 기계분야(2006년 박동명 과장) 등 다양한 공장활동 분야에서 개선활동이 활발히 이뤄지며 품질 명장이 잇달아 배출됐다. 특히 SK에너지가 지식경영시스템을 도입하며 제안 활동이 활발해진 2000년 이후 집중 배출되고 있다.
회사측도 현장에서 체질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품질명장으로 선발되는 기능직에 대해 승진과 공장 내 자가용 운행 등의 교통 편의를 제공하는 등 적극 지원하고 있다.
문향란기자
■ 직급별 직무역량 교육/ 기술인력 성장 뒷받침
SK에너지는 기술인력의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입사 직후부터 단계별로 다양한 직무역량 향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신입 기능인력에 대해서는 SK기업문화와 공정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기본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입사 후 3개월 동안 ▦정유업계의 특성 및 기본 공정에 대한 이해 ▦공장 내 각종 설비 기능 이해 및 견학 ▦기술직 역할에 대한 종합 이해 등 3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난 뒤 현업에 배치될 수 있다. 화학공학이론 교육도 필수과목. 특히 각 세부 공정의 구조 및 원리, 주요 설비의 기능 및 특성에 대한 교육이 현장실습을 통해 이뤄짐으로써 신입 직원의 현장 적응력도 키워주고 있다.
또 경력에 따라 기본-향상-심화 등의 수준별 교육과정을 이수하도록 돼있어 커리어 계발도 꾸준히 할 수 있다. 입사 2년차까지는 증류의 이해, 생산관리 등의 기본과정 20과목을 이수하고, 5~11년차 기술직들은 운전실무 이론 및 설비 세부원리를 습득할 수 있는 향상교육과정을 개설해 1일 과정 12과목을 수강해야 한다. 심화교육과정은 공정설비의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리급 또는 선임대리급을 타깃으로 한다.
SK에너지 관계자는 "기술 인력이 경력에 따라 필요한 역량을 체계화해서, 교육훈련시스템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문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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