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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정치언어' 알아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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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정치언어' 알아듣기

입력
2009.12.1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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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정치'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살이를 구석구석 살펴 사람들이 더불어 사람답게 살도록 다스림을 펴는 일인데 이보다 더 '할 만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비롯해 온갖 일을 '다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소란스러운 삶이 다스려지니까요. 옛날에는 그 힘을 하늘이 내린 거라고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을 사람들이 위탁한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힘의 원천이 하늘이든 땅이든 정치적 힘이란 근원적으로 '위탁된 것'이라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그 힘 때문에 우쭐해서 그런지 그것을 위탁한 주인을 섬기는 데 쓰기보다 자기를 위해 씁니다. 힘을 함부로 하여 오히려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정치를 '필요악'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정치의 울안에서 삽니다. 사소한 일상뿐만 아니라 운명조차 정치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를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답답합니다. 그런 것이 정치라면, 그것이 아무리 '힘'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정치와 소통하는 일에 장애가 없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정치언어'는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요즘 바짝 더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말은 "흰 것은 희기 때문에 검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말은 "길지 않은 것은 짧아 결국 긴 것이다"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언어의 어휘를 애써 천착하고 그 문법을 익히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낯선 언어에 부닥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잘 듣고 곰곰이 따져보면 그것이 경제든 과학이든 예술이든 결국 '아하!'하는 터득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어느 자리에 이르면 내 일상의 경험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정치언어는 그렇지 않아 당혹스럽습니다. 정치의 범주가 우리들이 사물을 보는 일상적인 범주와 달라 그런가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이른바 경제나 과학이나 예술 등도 실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느 시인이 '셋에 둘을 더했더니 열이 되었다!'고 읊어도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범주를 달리해서 다가가려 해도 정치언어는 자신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정치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낌새를 발견한 것 같아 혼자 즐겁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치언어는 처음부터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것은 '도구'인 것 같습니다. 물론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정치언어는 그러한 의미의 도구가 아니라 그저 '도구'입니다. '도구화된 언어'도 아닙니다. 억지로 말한다면 '힘의 도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리스 신화 때문입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 에 보면 제우스는 천상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힘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힘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제우스는 왕이 되자 여신 메티스(Mētis)와 결혼을 합니다.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녀를 길들여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신의 이름 메티스(Mētis)는 메티스(mētis)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것인데, 이는 재주, 계략, 교활, 현혹 등 일련의 칙칙한 '앎의 스펙트럼'을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우스가 메티스와 결혼하여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우스는 절대적 통치자의 자리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힘의 언어, 곧 명령이나 협박이나 질책이나 강제의 언어만이 아니라 이러한 언어에 더해 그럴싸한 묘사언어, 계략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순수하게 보이는 언어, 전략적 목표를 드러내지 않은 채 수사적(修辭的) 효과만으로도 자기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언어, 혼란스럽지만 찬란하고 정연하지 않지만 감동스러운 언어, 끊임없이 강조하고 반복하여 화자도 청자도 모두 그 말에 사로잡혀 버리는 주문(呪文)과 빙의(憑依)의 언어 등이 마련되지 않으면 '통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메티스와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못하면서 서둘러 결혼을 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녀를 길들여 자신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복심(腹心)을 품고 한 결혼인 것을 감안하면 통치 현실에서 '힘의 한계'를 얼마나 철저히 겪었기에 온갖 '언어'가 그리 절박하게 필요했을까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득한 신화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우리 문화의 뿌리와 직접 닿지 않는 먼 곳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정치'와 '정치언어'와 '정치적 인식'을 가늠할 수 있는 '정÷?속성'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결국 정치언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메티스'입니다. 책략과 계략의 언어, 또는 교활한 언어입니다. 그러고 보면 비록 공감과 이견이 없지 않다 할지라도 정치언어를 당연히 소통 가능한 일상의 언어일거라고 판단한 우리가 오히려 과오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언어는 '힘'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여긴 '도구'이하도 이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언어를 이렇게 이해하고 들으면 정치적 발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흐릿하나마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치언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정치적 발언을 다음의 두 문장으로 다듬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는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진실을 선포할 수 있다'는 문장입니다. 무슨 주제를 어떻게 이야기하든 정치적 발언은 이 문장으로 바꿔 들어야 겨우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아직도 모호하다고 판단된다면 두 번째 문장으로 바꿔보면 아주 뚜렷해집니다. 두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실처럼 들리는 많은 거짓말을 할 줄 안다.'

정치는 메티스와 결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정치언어는 불가피하게 메티스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정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라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제우스의 이야기는 조금 더 진전됩니다. 메티스가 낳을 아들, 곧 '힘과 책략의 결합'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 제우스를 무너뜨릴 거라는 예언을 듣고 제우스는 메티스를 잡아 삼켜 자신의 몸 속에 가둡니다. 힘과 양립하는 화려한 아내로서의 메티스가 아니라 힘 안에 내재화된 메티스, 그래서 힘의 가장 깊은 데서 다만 지혜로만 숨 쉬는 앎으로 메티스를 길들이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제우스의 주권은 마침내 안정을 찾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발언하여 그저 부는 바람에라도 싣고 싶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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