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광점(光點)을 응시하고 있으면 고정된 광점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터키 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사회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이 자동운동을 사회적 규범의 형성을 밝히는 실험에 활용했다. 암흑 속에서 영사막에 한 점 빛을 비추어 3명씩 짜진 피실험자들에게 보여준 후 자동운동의 방향과 크기에 대해 물었다.
상황에 흔들리는 연약한 개인
집단마다 운동 방향과 크기가 천차만별이었지만 동일 집단에 속한 피실험자들은 일치된 인식을 보였다. 집단 내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판단 차이를 조정, 공통인식으로 모은 결과였다. 이렇게 굳어진 인식은 나중에 소속 집단을 바꿔도 변하지 않았다. 불분명한 상황에서 판단을 할 때 남과 동조하기 쉬운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솔로몬 애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인지한 명백한 증거조차 포기하고 집단의 의사에 굴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실험으로 밝혔다. 123명의 남성피실험자들은 각자 자신과 같은 피실험자로 보였지만 실은 '실험 공모자'인 5~7명과 집단을 이뤘다. 수직으로 선분 하나(X)가 그려진 카드를 보인 후 서로 길이가 다른 세 선분(A, B, C)이 그려준 다른 카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X 선분과 길이가 같은 선분이 어느 것이냐고 물었다. A 선분은 X보다 짧고, B 선분은 같고, C 선분은 길었다. 피실험자는 실험 공모자들의 대답을 충분히 듣고 맨 마지막이나 끝에서 두 번째로 대답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실험 공모자들이 정답을 밝힌 실험에서는 피실험자들 거의 모두 정확한 답을 골랐다. 그러나 실험 공모자들이 일부러 오답을 밝히면서 피실험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37%의 피실험자가 자신의 분명한 인식을 부정하고 집단의 의사를 추종했고, 75%가 여러 차례 거듭된 실험에서 최소한 한 번은 집단 의사에 추종했다.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지킨 사람은 25%에 불과했다. 대답의 맞고 틀림에 따른 상벌이 전혀 없었는데도 피실험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집단의 다수에게 별종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랐다. 개인에게 집단의 압력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지를 일깨운 실험이다.
애시의 제자인 스탠리 밀그램이 예일대에서 행한 유명한 '밀그램 실험'은 인간이 인식의 집단 추종ㆍ동조 현상을 넘어 구체적 행동에서도 권위에 복종해 아무런 자의식 없이 악을 자행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평범한 시민인 피실험자들에게 교사 역할을 맡기고, 다른 방의 '학생'에게 질문을 해서 틀린 답이 나올 때마다 5V~450V의 전기충격을 단계적으로 가하도록 했다. 전기충격을 가하면 신음과 비명 등 고통스러운 '학생'의 반응이 '교사'에게 들리도록 했다. 물론 '학생'은 실험공모자로, 실제로는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았지만 '교사'를 감쪽같이 속였다.
실험 결과 65%의 피실험자가 죽음을 부를 수 있는 450V의 전기충격까지 가했다. 다수의 피실험자들이 예일대의 권위와 실험 참가비에 대한 부담에 굴복, 예상을 크게 웃도는 강도로 불합리한 명령을 수행했다.
지식의 왜곡과 부패도 여전해
듀크대의 티머 큐란 교수가 밝힌 '선호 위장(Preference Falsification)'이론은 집단이나 권위에 추종하거나 복종하는 개인의 행동이 얼마나 커다란 정치사회적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인은 공적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사회가 용납할 수 있도록 위장하거나 진정한 의사를 감추기 쉽다. 개인의 '선호 위장'은 타인의 '선호 위장'을 불러 확대 재생산되며, 불합리한 정책이나 관행의 혁파를 가로막는다.
한국사회는 그가 지적한 '공적 영역에서의 지식의 왜곡과 부패, 황폐화'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 것인가. 권위주의 정권이 역사 속으로 지고, 정치 권력의 독점적 권위 지배가 끝났는데도 권력과 주파수를 맞추려는 지식사회의 경향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인식과 행동의 동기가 공포 대신 사회경제적 이익으로 바뀌었지만, 외롭게 마련인 복종하지 않을 자유를 내던진 것이야 다를 바 없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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