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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28> 12월 파리, 우연한 만남과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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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28> 12월 파리, 우연한 만남과 인연

입력
2009.12.1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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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12월에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 파리 출장은 현지에서 프레스와 커머셜을 담당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파리에 진출한지 10년이 넘은 지금, 새로운 변화를 위한 모색하기 위한 일이었다. 코앞에 닥친 뮤지컬 선덕여왕의 의상 준비로 바빴지만 간신히 짬을 냈다.

파리의 겨울은 눈 대신 비가 내린다. 겨울 내내 구름이 짙게 깔려 거리는 회색빛으로 물들고 여기에 차가운 비가 내리면 방안에서도 습한 내음이 느껴진다. 내가 머물렀던 5박6일의 출장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내렸다.

겨울 내내 지속되는 이런 회색의 습한 기운이 파리지앵들을 더욱 시니컬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의 불빛들은 오히려 더욱 특별한 분위기를 머금게 한다.

첫날밤 미팅이 끝나자마자 나는 샹젤리제로 향했다. 샹젤리제에서 마주친 관광객들은 연실 카메라와 휴대폰을 꺼내들고 촬영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의 음악처럼 거리에서 울려 퍼진다. 나도 그 무리에 속해 오랜만에 거리를 걸으면서 낭만에 젖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누구나 음유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연말이면 파리 샹젤리제에는 세느강변처럼 가판 행렬들이 거리를 메운다. 여기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며 행복한 겨울을 만끽한다. 그리고 뛸러리 공원 입구에서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관람차도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파리의 풍경이 되었다.

거리는 사람과 차로 가득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기다리며 느긋한 마음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파리에서 내가 즐겨 찾는 곳은 벼룩시장이다. 이번엔 파리 남쪽 죠르주 블라셍 공원에 위치한 고서적 벼룩시장을 찾았다. 전에 이곳에 들렀을 때는 19세기 후반의 모자와 빛 바랜 흑백 필름 원판사진, 그리고 그림과 스케치들을 구입했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옛 향기에 취하고 싶어 다시 그 곳을 찾았다.

그런데 이번엔 이곳에서 아주 특별한 책 두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는 1904년에 출간된 죠르주 뒤그로크(Georges Dugrocq)라는 사람이 쓴 <가난하고 고요한 한국(pauvre et douce corée)> 란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1890~1910년 사이에 출간된 것으로 짐작되는 문화 인류학자인 마담 끌레르 보티에(Madame Claire Vautier)와 이포리뜨 프란뎅(Hippolyyte Frandin)이 지은 <한국에서(en corée)> 란 책으로 모두 우리나라 개화기에 관한 책이었다.

이 책을 팔고 있는 벼룩시장 주인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 관한 고서는 매우 희귀해서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서들은 시간의 흔적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여행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한국에서(en corée)> 라는 책의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피부가 희고, 건장하고, 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이런 우월한 신체 조건에 대해 매우 커다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시의 생활 모습과 왕궁, 정자의 모습을 담은 풍물사진, 중국 천진 유배시절의 대원군 사진, 그리고 당시 외무부를 담당하는 대신과 예조를 담당하는 대신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우리 옛 선조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내 모습과 나의 어릴 적 모습들이 중첩되며 연상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고서적들 틈에서 나는 시간의 여행을 즐기다 프랑스에서 70~80년대에 유명했던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스케치들을 접하고는 같은 디자이너로서 마음이 아팠다. 그 디자이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의 후손들은 그가 작업했던 흔적들을 모두 내다 팔아 이 곳 벼룩시장에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인생무상'이란 말을 새삼 실감하며 과연 내가 떠나고 난 뒤 내 흔적들도 어디선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렇게 나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도 지금의 나처럼 이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또 하나는 1911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훈장이었다. 가게 주인은 어느 유명한 프랑스 발명가의 훈장이라고 했다. 나는 역사적인 가치를 떠나 수공으로 만들어진 메달과 훈장들이 너무 멋져 보여 주저하지 않고 구매하게 되었다.

요즘 훈장 같은 장신구들이 액세서리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지만 나도 언젠가 멋지게 차려 입고 거기에 훈장을 달고 파티 같은 자리에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훈장 이외에도 나는 그 곳에서 프랑스의 패션 신동이라 불리는 패션디자이너 '장폴 고티에'의 80년?패션쇼 음악 LP재킷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때가 이 디자이너에겐 한창 떠오르며 주목 받던 시기였고, 나에게는 패션에 대한 열정과 꿈을 키워가던 시기였다. 앨범 재킷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 때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파리의 겨울이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어서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발걸음이 샹젤리제로 향해서 그런 것일까? 이번 서울 패션쇼에서 같이 작업한 비디오영상 아티스트인 최종범씨와 씨댄스의 무용단원들을 그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만 12월 파리에서는 모든 인연이 샹젤리제에서 이루어지나 보다. 새로운 미팅을 통한 새로운 인연, 그리고 우연한 만남, 12월 파리의 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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