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먹구름이 깔린 쌀쌀한 날씨를 뚫고 원종임(69)씨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버스로 30분 걸려 서울 용산구 시립용산노인복지관에 도착한 원씨는 직원에게 도시락 가방을 건네받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20분 걸려 당도한 곳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허름한 단독주택. 조월선(85)씨의 10만원짜리 월셋집이다. 원씨가 2004년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가정방문 봉사'에 자원하면서 두 할머니는 5년간 따뜻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원씨가 좁은 거실을 지나 4평 남짓한 방에 들어서자 전기장판에 누워있던 조씨가 반색하며 힘들여 몸을 일으켰다. 조씨가 노환으로 귀가 어둡다 보니 두 사람은 첫 인사부터 목소리가 높아진다.
"할머니, 저 왔어요. 잘 주무셨어요?" "엉, 뭐라고?" "밤새 안춥게 잘 주무셨나고요!" 원씨가 조씨의 귀 가까이에 대고 또박또박 말을 하자 그제서야 대화가 이어진다. "추운데 집에 있지, 뭐 하러 또 왔어?" "점심 드리고 같이 놀다 가려고 왔죠." 조씨가 얼굴에 주름 가득하게 웃는다. "고마워. 팔도 다리도 아픈데 찾아오는 사람은 아줌마뿐이네."
원씨는 매주 목ㆍ금요일 복지관에서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들고 조씨를 찾는다. 조씨는 원씨와 동갑인 장남과 함께 살지만, 아들은 잠잘 때만 빼곤 노인정이나 공원에서 소일한다. 근래 들어 화장실도 벽을 짚고 가야 할 만큼 쇠약해진 조씨는 누워 있느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다.
원씨가 찾아와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원씨는 정해진 날이 아니더라도 수시로 조씨 집에 얼굴을 내민다. "워낙 고령이시고 집에 전화도 없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원씨는 직접 끓여온 배춧국과 함께 도시락을 건네고 방 청소를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어 다음에 챙겨올 반찬도 점검했다. 가끔 조씨의 부탁으로 과일, 빵, 고추장 등 먹을거리를 사오는데 이럴 땐 조씨가 돈을 꺼내지도 못하게 한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원씨를 보며 조씨는 "잘해요, 우리 아줌마가 참 잘한다고"라며 연신 고마워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품새가 마치 모녀 같다. 조씨가 살아온 얘기를 풀어놓기라도 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경북 김천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가난한 농가에 시집 간 그녀는 스물셋에 상경해 남편과 품팔이를 하며 삼남매를 키웠다.
남편과 20년 전 사별한 후엔 삶이 더욱 고될 수밖에 없었다. 조씨는 "많이 가르치지 못해 자식들한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이날 두 사람은 모처럼 화투 놀이를 했다. 최근 몇 달간 앉아 있을 기력도 없던 조씨가 좀 나아진 듯하자 원씨가 판을 깔았다. "첫 판부터 다 가져가시면 어떡해요? 광밖에 먹을 게 없네."
원씨가 투덜대자 조씨는 "오늘따라 짝짝 잘 붙네"라며 잇몸이 드러나게 웃었다. 민화투 세 판을 쳤는데 조씨가 두 번 이겼다. 원씨가 "셈도 잘하시고 기억력도 좋으시니 오래 사실 것"이라고 덕담했다.
5년 전 처음 만나 서먹했던 두 사람을 가깝게 해준 것이 바로 화투다. 원씨는 "친해지려고 말을 붙였더니 할머니가 '아줌마도 오다 말 거면서 뭘 그리 꼬치꼬치 묻느냐'며 쌀쌀맞게 대하셨다"고 말했다.
조씨는 "복지관이나 동사무소에서 사람이 찾아와 손 잡고 선물도 주고 했던 게 10년도 더 됐는데 두 번 이상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며 겸연쩍어 했다. 원씨는 '진심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한 달 동안 매일 조씨 집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구석에 놓인 화투장을 집어들고 '한 판' 하자고 청했다. 그 길로 조씨의 마음은 조금씩 풀어졌다.
원씨는 "봉사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내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되갚는다는 생각에 오히려 행복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손녀를 거둬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키웠다.
원씨가 어머니의 빈 자리를 거의 느끼지 못했을 만큼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할머니(조씨)가 저를 늦게 얻은 딸로 여기시고, 지금처럼 재밌는 옛날 얘기 들려주며 오래 사셨으면 해요."
원씨는 지난 3월 남편과 사남매, 손주들의 축하 속에 칠순 잔치를 치렀다. 그런데도 그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인다. 원씨는 "봉사 활동을 하며 더 건강해졌다. 함께 가정방문 봉사를 하는 분 중엔 74세도 있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남편도 정년 퇴직하면서 찾아든 허전함을 극복하려 봉사에 나섰다는 그는 "앞으로도 이렇게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덧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원씨가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흰색 목도리를 조씨 목에 둘러줬다. "밖에도 못나가는데 뭐 하러 이 비싼 걸 사오냐"고 하면서도 조씨는 미소를 지었다. 원씨는 내처 19일 복지관에서 열리는 송년잔치에 함께 가자는 약속도 받아냈다.
"내일은 주말에 드실 거 많이 싸들고 일찍 올게요." 원씨가 일어섰다. "더 놀고 가라"고 잠시 붙들던 조씨는 원씨가 말리는데도 기어이 벽을 짚고 일어서서 배웅했다. 현관에서 손을 맞잡은 두 노인의 작별 인사는 아주 길었다. 틱, 틱, 틱, 슬레이트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좁은 집에 울려퍼졌다.
강성명 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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