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 위기' 막자는 명분에 '시장 위기'
2009년을 보내는 국내증시는 만감이 교차한다. 금융위기 여파로 우울하게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젠 희망과 도약을 얘기하고 있다.
연속 기획시리즈 '다시 금융이다'를 연재 중인 한국일보는 은행(1부)과 보험(2부)에 이어, 금융위기 이후 재도약을 꿈꾸고 있는 증권업계(금융투자업계)의 당면 과제와 해법을 점검한다.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의 내년 경영목표는 '기업 유전자 교체'다. 주요 증권사 가운데 중개수수료 의존율이 가장 높은 이 회사를 투자은행(IB) 부문의 강자로 만들겠다는 것.
그는 이에 따라 2010년 상반기에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와 헤지펀드를 설립하는 한편, 선물업과 FX마진거래 등의 신규 업무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최 사장은 "자본시장통합법이 금융투자(증권+자산운용+선물) 업계의 영역을 넓혀 준 만큼 본격적인 경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올 2월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자본시장의 오랜 칸막이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자율과 경쟁의 기둥을 세운 자통법은 분명 패러다임의 대전환이자, IB으로 향한 첫 걸음으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시행 1년을 맞는 자통법의 성과는 아직 기대 이하다. 성과를 논하기엔 이른 시점이고, 공교롭게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탓도 있지만, 자통법 이후 시장과 시장참여자들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우선 국내 증권사들의 IB부문을 들여다보면, IB란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비교적 IB비중이 크고 기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대형증권사들 조차, 전체 수익에서 IB업무가 창출하는 이익비중은 10%에도 못 미친다.
"자통법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한국거래소'로, 증권업협회가 '한국투자금융협회'로 이름을 바꾼 것"이란 자조 섞인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금융위기 탓이 컸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당초 자통법이 만들어졌을 때 정부도 증권사들도 '머지않아 한국판 메릴린치가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들 얘기했는데, 이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정작 메릴린치 자체가 간판을 내리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다"면서 "월스트리트의 IB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국내 증권사들이 내놓고 IB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IB부문이 계속 위축되는 데에는 정부나 정치권 등 '시장 외적'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증권업계의 지적이다.
예컨대 현재 국회에는 장외파생상품을 만들 때 사실상의 사전허가를 받도록 하는 입법안과 파생상품거래시 세금을 부과하는 입법안 등이 계류되어 있다.
자칫 탐욕과 투기로 넘칠 수 있는 위험거래를 적절히 규제함으로써 제2의 금융위기를 막아보자는 것이 이 법안들의 취지이긴 하나, 이는 자통법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시장자율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또 해외펀드수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려는 정부방침도 시장을 키우기는커녕, 더 위축시킬 소지가 크다는 평가다. 증권업계에선 "금융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정부가 간섭과 통제 위주의 '자통법 이전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CEO는 "금융위기 이후 정부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면서 "예를 들어 IB부문과 자기자본투자(PI) 부문의 유기적 연계를 위해서는 증권사도 운용업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당국이 최근 부각된 위기를 명분으로 지나치게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CEO도 "SPAC의 경우 기본적으로 PI부서에서 담당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IB부서와의 협조가 필요한데도 '차이니즈 월'(이해상충을 막기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에 대한 통제가 워낙 심해 어려움이 크다"고 밝혔다.
요컨대 규제는 최소화하되, 세부적 운영은 업계 자율에 맡기고 금융당국은 큰 틀에서 애초의 법 제정 취지를 다시 살려달라는 것이다.
물론 감독 당국 지적도 일리는 있다. 업계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자통법 시행으로 증권사들은 ▦CMA신용카드 발급 ▦대출중개 주선 ▦지급보증 등의 업무도 인가를 받았으나, 실제로 우량 중소기업에 대해 지급 보증한 사례는 한 건도 없는 상황이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이 '밀운불우'(密雲不雨ㆍ구름은 많은데 비가 오지 않는다)라며, 업계의 과감한 M&A와 그에 따른 대형 선도 증권사의 출현이 늦어지고 있는 점을 개탄한 것도 이 같은 인식 때문이다. 업계도 '자율시대에 걸맞은 경쟁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 전문가 제언/ "자율·창의정신 중시 자통법 취지 회복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이 금융 위기와 겹치면서 시장 분위기가 규제 위주로 흐른 경향이 있다. 이제라도 자율과 창의를 중시하는 자통법의 취지가 살아나도록 업계와 감독 당국 모두 노력해야 한다.
업계는 무엇보다 고객 요구에 맞춰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또 전문인력을 꾸준히 육성하는 한편 내부통제시스템에 대한 관리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당국은 감독의 초점을 바꿔야 한다. 일일이 간섭하는 대신 자율성을 인정하되, 개별 회사의 리스크 관리에 무게 중심을 둬야 한다. 또 투자자보호에 대한 감독 수준은 더욱 높여야 한다."
노희진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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