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바둑/ 돌부처 '시간패 해프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바둑/ 돌부처 '시간패 해프닝'

입력
2009.12.14 00:33
0 0

8일 열린 37기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결승 3국에서 뜻밖의 '시간 패 해프닝'이 있었다.

바둑이 종반에 접어 들어 상당히 미세한 형세인데 한쪽에서는 패싸움까지 걸려 있어 반면이 대단히 복잡한 상태였다. 두 대국자 모두 각자 제한 시간 2시간을 다 쓰고 1분 초읽기도 2회 사용해 마지막 1분 초읽기 하나씩밖에 남지 않았다.

이창호가 자신이 둘 차례에서 착수한 다음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이런 경우 원성진의 시계가 바로 돌아가야 하지만 마지막 초읽기 때는 자리를 비운 이창호와 똑같은 시간적 편의를 상대에게 제공하기 위해 원성진의 시계를 일단 멈추었다가 이창호가 자리에 돌아온 후부터 원성진의 시계를 작동시키는 게 관례다.

그러나 이날 계시원이 이를 잊었는지 이창호가 자리를 비웠는데도 계속 원성진의 시계를 작동시켜 50초가 지나자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셋…"하고 초를 읽기 시작했다.

원성진은 당연히 이창호가 돌아올 때까지 자기 시계가 돌아가지 않을 걸로 생각하고 있다가 계시원이 갑자기 초를 읽기 시작하자 매우 당황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시간 패를 당할까 걱정돼서 일단 바둑판에 돌을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창호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경위야 어떻든 조금 전에 원성진이 착수했으므로 지금은 이창호가 둘 차례다. 한데 이창호는 이런 경우 평소 관례대로 원성진이 아직 착수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기고 한참 동안 멀거니 앉아서 원성진이 바둑판에 돌을 놓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계시원이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셋…"하고 초를 읽는 게 아닌가. 이창호는 그때까지도 당연히 원성진의 시계가 돌아가는 줄 알고 있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반면을 다시 들여다보니 아뿔싸 상대의 돌이 이미 반상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황급히 바둑돌을 집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계시원이 "아홉 열"까지 읽어 버린 것이다.

결국 외견상으로는 이창호의 시간 패처럼 됐다. 대국 진행자들도 뜻밖의 사태에 깜짝 놀라 잠시 대국을 중단시키고 옆방에 대기 중이던 입회인 김동면 9단에게 유권해석을 청했다.

김 9단은 즉시 두 대국자와 계시원을 만나 상황 설명을 들은 후 애당초 계시원이 이창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원성진의 시계를 작동시켜 초를 읽은 게 잘못이라며 이창호가 자리에 돌아온 후에 원성진이 착수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국을 속개키로 두 대국자와 합의했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모든 분쟁이 발생했을 때 대국 당사자 간 합의가 최우선이므로 일단 별 문제 없이 지나갔지만 당시 바둑TV 생중계를 지켜본 바둑 팬들로부터 "이창호의 시간 패가 아니냐"는 문의가 많았다. 이유야 어떻든 TV 화면상으로는 원성진이 착수한 뒤 1분이 넘도록 이창호가 착수하지 않은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프로 기사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해 서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애당초 이창호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대국 정지 상태로 보아야 하므로 그동안 원성진이 착수한 것 자체가 원인무효"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상대가 착수했는지, 아닌지 확인할 책임은 대국자 본인에게 있다.

만일 원성진이 강력하게 시간 패라고 우기며 정식으로 문제 삼았으면 분쟁조정위원회서도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입회인의 중재안을 받아들인 원성진이 역시 대인"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이 같은 해프닝이 벌어진 근본적 이유는 현재 한국기원에 공식 대국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분쟁에 대해 자세하게 해결 방법을 밝힌 명문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바둑이 공식 체육으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도 해묵은 대국 관례나 당사자 간 합의라는 그때그때 땜질식 해결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