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청록파 박목월(1916~1978) 시인의 대표작인 '윤사월'은 적막한 산골마을에서 꾀꼬리 울음을 듣고 있는 외딴집 눈먼 처녀의 외로움을 정제된 언어로 보여준 작품으로 지금도 애송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왜 일제시대에 흔했던 폐결핵이나 말라리아 환자가 아니라 시각장애인 여성을 시에 등장시켰을까 관심을 기울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유종호(74) 전 연세대 교수는 이 시를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들여다본다. 하사마 분이치(狹間文一)라는 일본인이 1944년 펴낸 <조선의 자연과 생활> 에 따르면 해방 직전 전국의 시각장애인은 2만명이고 안과전문개업의는 20명이며 그 중 8명이 서울에 있었다. 그때 안과질환은 유아들에게 가장 흔한 질환이었다. 일상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당시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젖먹이 때 영양부족으로 안질을 앓았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실명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론하는 유씨는 "박목월 시에 나오는 눈 먼 처녀는 틀림없이 유아기 안질의 희생자였을 것"이라며 "그렇게 생각하고 시를 읽으면 공연히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조선의>
유씨는 새 시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 (서정시학 발생)에서 시어에 묻어있는 당대의 사회적ㆍ정치적 함의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시 읽기의 묘미를 맛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시 연구라면 의당 작가론을 떠올리는 독자들에게 시어의 함의를 세밀하게 음미하고 당시의 사회상을 그려보는 이런 독해법은 신선하다. 가령 저자는 1950년대 서정주가 발표했던 '시월유제'의 한 구절 '한동안씩 잊었던 이 엽전(葉錢)선비의 길'에 나온 '엽전선비'라는 시어에 주목한다. 모더니즘 구호가 판치던 당시'엽전'은 구습에 젖어있는 한국인들이 자기비하적인 뜻으로 흔히 쓴 표현인데 신라정신을 내세웠던 시인이 '엽전선비'라는 시어로 자기 신세를 반어적으로 표현했다는 것. 유씨는 이는 비속어이되 비속하지 않고 자조적이되 비굴하지 않은 반속(反俗)적 함의가 짙은, 대체불가능한 시어라며 시의 재미란 이런 묘미 찾기라고 설명한다. 시와>
시각을 나타내는 표현도 세월에 따라 크게 변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하는 김광균의 '추일서정'은 언어의 변천사를 알아야 그 시간적 배경을 추론할 수 있다.'새로 두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라는 구절은 젊은 세대에게 요령부득일 수 있지만, 시 해석의 단서가 된다. 1940~50년대에는'오전 두시'가 흔히 '새로 두시'로 쓰였다. 이런 세세한 것에 대한 음미야말로 시 읽기가 주는 재미라고 유씨는 강조한다.
언어의 시대사적 맥락 파악이나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한 이런 시 읽기는 필수적이지만, 유씨에 따르면 단어 하나하나를 허술히 다루는 병폐는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하다. 가령 정지용의 시 '촉불과 손'에 나오는 '초밤불'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그런 예다. 서울대 국문과의 한 교수는 '초밤불'을 '결혼 첫날 밤에 밝히는 불'이라고 해석했는데 유씨는 이를 '저녁에 켜는 불'로 정정한다. 정지용은 이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To the evening star'를 '초밤별에게'로 번역한 바 있으며 정지용 이후에도 조지훈의 '편지'나 임학수의 '코스모스'같은 시에서 '초밤별'이라는 시어가 '저녁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유씨는 "리얼리즘, 민족문학론 등 거시적 담론이 지배하는 가운데 메시지 중심으로 작품을 들여다보는 문학연구 풍토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꼬집으며 "'문명이란 조그마한 차이의 감각'이라는 레비 스트로스의 말처럼 적어도 시를 이야기할 때는 시어의 뉘앙스 같은 미시적 세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용적인 중국인들이 관료를 뽑는데 시를 시험과목에 넣었던 이유는 시 읽기를 단순히 감상이 아니라 지적 훈련의 과정으로 봤기 때문"이라며 "언어에 대한 세세한 분석과 검토를 통해 독해적 상상력의 세련을 도모하자는 것이 이 책을 낸 이유"라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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