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부터 대관령과 경포대, 정동진을 잇는 트레킹 코스 개척에 나섰다. 고향을 떠나 있는 작가로 주말마다 시간을 내 조상 대대로 걷던 옛길을 찾아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면 찾는 이들도 즐겁고 고향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길 이름도 강원도 정서에 맞게 '바우길'이라고 정했다.
시민이 주인인 길이라 함께 코스를 개척했다. 옛길을 찾아내는 일이니 크게 돈 들일 데도 없어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10개 구간 150km의 트레킹 코스를 만들었다. 홈페이지를 열기 전 공식 카페를 만들고 매주 전국의 트레킹 애호가들이 참가하는 시범 걷기를 했다.
자료를 일찍 공개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제주 올레길과 같은 바우길이 개발됐다는 보도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민간단체가 비슷한 트레킹 코스를 소개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열 개 구간 가운데 다섯 구간이 똑같거나 절반 이상 겹쳤다. 누가 봐도 바우길 베끼기였다. 그 단체는 강릉시에 예산 지원까지 요청한 상태라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반년 가까이 시민들과 함께 일군 결실을 한 순간에 모두 가로챈 것이다. 바우길이 정한 '대관령 등길'과 '대관령 옛길'의 구간 명칭까지 그대로 베껴서 고속도로 교통 표지판만하게 길 안내판을 세워놓은 것이었다.
바우길 개척을 끝내고 강릉시에 산림청과 협의하여 바우길 이름과 주변 환경에 걸맞게 소박한 방식의 길 안내판을 세워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관의 덕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국유지에 함부로 땅을 파고 입간판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바우길 걷기' 여행상품까지 등장했는데도 강릉시는 바우길 안내판 문제에 끝까지 침묵했다. 다른 안내판은 시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왜 저토록 편파적일까, 여러 의문이 생겼다. 남들이 탐사한 길을 이름까지 베껴 쓰는 건 인성에 관한 문제라 치고, 커다란 길 안내판을 순식간에 설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힘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시 직원들과 이런 저런 회의를 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책상 위에서 열심히 지도를 보며 작업한 제안서가 시에 제출됐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역에서 저토록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이 무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중에 그 단체 구성원 대부분이 지역 고등학교 동문들이며, 단체 대표자는 지역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유력자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길도 아니고 시민과 애호가를 위한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며 조경업체로부터 예산 견적부터 뽑고, 시민들과 인터넷을 보고 길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혼선을 주든 말든 또 다른 이름의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트레킹 코스 개척을 자기 현시나 이익 창출의 터전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저럴 수 없는 일이다. 지역 사회에서 안 되는 일 없는 힘으로 바우길과 중복되는 다섯 개 코스에까지 공사판을 벌이지나 않을지 그것조차 불안하다.
이것은 극히 심하고 드문 경우겠지만, 전국 각지의 트레킹 코스들 역시 대개가 지자체 예산으로 개척되다 보니 또 다른 난개발 문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길은 개인의 명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삶을 잇고 일과 휴식과 놀이를 잇는 길이다. 부디 전국의 길을 여는 사람들 모두 순리대로, 또 자연 그대로 길을 개발했으면 좋겠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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