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엮음/글항아리 발행ㆍ352쪽ㆍ2만2,000원
'선비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으레 자신의 학문을 밝히느라 이재(理財)에는 어두운 청빈의 학인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선비정신은 출세와 녹봉을 위해 관직에 나가기보다 자신의 뜻을 초야에 묻는 염결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게 어쩌면 현재라는 동굴에 갇혀 사는 현대인이 조선 선비의 어떤 그림자를 오독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선비의 귀감으로 꼽히는 퇴계 이황(1501~1570)이 150여명의 노비와 수천 두락의 전답, 서너 채의 집을 소유한 갑부였다는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펴낸 <조선 양반의 일생> 을 보면 "학자의 지조와 절개도 비교적 안정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돼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일반적 생각과 달리 양반들은 가계를 운영함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경제관념 또한 철저했다"고 밝힌다. 조선>
이 책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올해 상반기 진행한 시민강좌의 내용을 가지런히 정돈해 묶은 것으로, 조선 양반의 실상을 그들이 남긴 문헌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녹봉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찮은 것이었던가 보다. 관료였던 유희춘(1513~1577)이라는 이가 남긴 '미암일기'(1567~77)에 따르면 그는 8년간 모두 18차례의 녹봉을 받지만 '경국대전'이 정한 만큼을 받은 예는 6차례(35%)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제 녹봉을 못 받았다고 한다. 흉년이 들거나 중국 사신의 왕래가 잦아 나라살림이 쪼들리면 흔히 규정은 무시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조선 양반을 지탱해 준 주요 경제 시스템으로 선물(膳物)경제를 꼽는다. '미암일기'를 기록한 10년 동안 유희춘은 총 2,885회(월 평균 42회)의 선물을 받는다. 면포와 의류, 문방구류, 포육ㆍ어패류 등 선물을 통해 그는 집안의 재산을 증식한다. 하지만 그가 1571년 3~10월 전라감사라는 지방관으로 있었을 때는 선물을 받는 횟수보다 주는 횟수가 많았다. 저자들은 이 같은 선물 수수가 등용과 보직 인사를 둘러싼 뇌물의 성격이 강했지만, 한편으로는 부의 재분배 체제의 일환으로 용인되던 관행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 책은 과거제와 관직 진출 관행, 양반 계급의 재생산 구조, 양반가 여성의 지위 등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졌거나 과장된 조선 양반의 실상을 문헌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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