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이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 먹거리마당 벽에 대형광고판이 붙었다. 행인은 걸음을 멈췄다.
정면을 응시하는 BMW 신모델(New X5)의 자태(사진발)가 황홀했을까, 일면 아니다. 2차원에 갇힌 녀석은 신기하게도 사람이 다가오면 전조등을 켜고 '부르릉' 시동까지 걸었다. 웬 조화냐 싶다.
원리는 간단하다. 독일에서 공수한 BMW의 헤드라이트와 시동 소리를 들려주는 스피커,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를 살짝 달았을 뿐. 그러나 아니 서고는 못 배기게 하는 마력(광고효과)과 평면을 입체화한 아이디어는 세상의 갈채를 받았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BMW 평면광고가 업계와 언론의 화두가 되어갈 무렵, 그는 화도 났다. 한두 번이면 참고 넘어갈 시동 소리가 수시로 귓전을 때리는데다 손님들은 예상치 못한 소음(?) 때문에 체하기 일보직전이라고 항의했다는 것.
선물을 쥐어주고 통사정도 했건만 그는 "시끄러워서 장사를 못하겠다"는 지청구만 했다. 결국 걸작은 시동 볼륨을 줄이는 수모를 당했다. 합의를 종용한 그는 근처 국수가게 아줌마다.
#2006년 독일월드컵 기간, 응원전의 메카인 서울시청광장을 발 밑에 둔 호텔에 어렵사리 방을 얻었다. 가족도 불렀다. 미친 듯이 호텔과 밖을 오갔다. 응원열기에 동참하려고? 결코 아니다.
경기내용과 응원이 안중에 들 처지가 못됐다. 숫제 떼고 내리고 떼고 내리고의 반복이었다. 공들여 공간을 사 도배(래핑)한 우리 광고물 틈에 경쟁사가 시간만 나면 자기네 광고포스터를 갖다 붙였기 때문이다. 치열한 신경전이 그라운드 밖에서도 벌어진 셈. 2002월드컵 때도 비슷한 고생을 한 탓에 뱃속에 있던 아기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빨리 나왔다.
옥외광고 플래너(Planner)가 전하는 뒷얘기다. 화려하고 기발한 광고물이란 빛의 이면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술자리 안줏감으로나 곱씹을만한 일화들을 그들은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기실 그것이 일의 맛이고 멋이기도 할 터. SK마케팅앤컴퍼니의 김홍성(팀장) 조현경 최정훈 김영광 플래너가 옥외광고의 숨은 매력을 광고한다.
옥외광고는 신문 TV 라디오 잡지 인터넷 등 5대 광고매체를 제외한, 예컨대 옥상간판 야립(野立)간판 애드벌룬 광고탑 네온사인 버스(지하철)광고 등을 이른다. 당신이 현관문을 나서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광고를 아우르기 때문에 '집밖 매체'(OOHMㆍOut of Home Media)라고도 불린다. 하다못해 공공화장실 벽에 붙은 '콩팥 삽니다. 01*-***-****' '위장을 살리는 거시기' 등도 옥외광고의 범주에 든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광고라고 치켜세우는 축도 있지만 그 원초적인 존재감 탓에 주류에서 밀려난 처지다. 도시미관과 환경을 해친다,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다, 광고효과가 떨어진다는 삿대질도 톡톡히 받고 있다. 별의별 규제와 뜻하지 않은 민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도 끌린단다. "다른 매체는 시간(방송)과 크기(인쇄매체), 더구나 평면이란 틀에 갇혀 있잖아요. 옥외는 무궁무진합니다."(김영광) 고층건물 전체를 시트지로 발라버린다거나 63빌딩 수족관 창을 휴대폰 화면처럼 구성한다거나 아이스링크 얼음판 밑에 광고를 싣거나 화장실 구석을 기발한 문구로 채우기도 한다.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광고효과가 있을법한 공간을 직접 찾아 광고를 집행하는 것이 옥외광고 플래너의 역할이다. 그래서 공간을 빌리는(보통 3개월, 최장 3년) 사람들이다. 구석구석 빈틈을 놓치지 않는 게 핵심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일상이다. "옥상에 뭐 하나 올릴라치면 지방자치단체의 심의위원회가 열립니다. 전원(8~10인) 일치 방식이라 누가 '색깔이 야해서 싫다''글자가 맘에 안 든다'고 토를 달면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관련 조례도 제 각각이고요."(최)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다가가면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 광고물을 세웠는데 한 어르신이 깜짝 놀라 넘어진 뒤로 바로 철거했죠."(조) 제 아무리 놀라운 아이디어라도 법과 민원의 올가미에 갇히면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답답할 노릇일 텐데 사뭇 여유롭다. 생명체가 그러하듯 옥외광고도 세월 따라, 환경 따라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옥상이나 판때기가 고작이었던 시절을 넘어 옥외광고는 버스와 지하철로, 인터넷을 동반한 쌍방향 참여 형태로, 소리와 움직임까지 담은 입체로 변모하고 있다. 비주류의 설움을 공간확장과 신기술 접목으로 떨쳐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옥외광고의 매력은 진화하는 외형이 아닌 내면이 품고 있다. "다른 매체는 안보면 그만이지만 옥외광고는 웬만해선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김영광), "눈길을 끄는 광고는 해당 공간의 값어치를 올린다"(최), "여러 제약이 있지만 어떤 매체보다 자유롭고 다양하게 창의적인 광고를 할 수 있다"(김홍성)는 것. 애정이 넘친다.
광고하면 상술의 극치, 더구나 옥외광고는 각종 오명(도시미관을 해친다 등)까지 쓰고 있으니 가슴 한 편이 서늘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시각적인 공해라 여기는 이들도 있는데 지하철 스크린도어만 해도 민간업체가 만들었다. 광고에 투입된 돈이 고스란히 시민의 안전으로 돌아간 거다"(김홍성), "낡고 진부한 광고라는 이미지가 남아있는데 최근엔 옥외가 더 첨단이고, 공간이란 큰 도화지를 채우는 멋진 일"(조)이라는 자부심도 내비쳤다. 조 플래너는 업계 유일의 여성이란 점도 강조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합법적으로 내건 현수막광고가 민원에 시달렸다. 백화점 오픈 광고였는데 부근 상인들이 들고일어나 현수막을 찢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 무조건 떼내고 고이 모셔뒀다가 주요한 시점에만 걸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폼 안 나는 일화를 들려주는 플래너의 낯빛은 밝았다. 그것이 숙명이라면 받아들이고 성실함으로 밀어붙이는 게 상책, 광고는 계속돼야 하니까.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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