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와서는 일단 이따금 들르던 김승균 선배 집으로 갔다. 김 선배 집은 조영래, 심재권, 김근태, 손학규 등이 자주 들르는 곳으로 며칠씩 묵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이 다니는 공장 근처인 보문동에 자취방을 하나 구해 전태삼이 하는 일을 가끔씩 거들면서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지를 일아 보았다. 특히 평화시장 근방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던 청계노조 김혜숙을 통해 일할 만한 곳을 한 군데 구했다. 김혜숙과 친한 언니가 운영하는 공장인데, 중부시장에 있었다.
10여명이 일하는 작은 공장으로 공장의 위치며 일하는 사람들의 품성으로 보아 있을 만해 보였다. 나는 앞으로 제품업(봉제업)을 하려는 사람인데, 경험을 쌓기 위해 공장일을 도우면서 지내는 것으로 했다.
그런데 머물고 있던 자취방이 여러모로 불편해서 다른 곳을 알아보았다. 전병용씨 형님의 처남댁을 거쳐 결국 평화시장에서 가까운 신당동에 방을 구했다.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집이어서 대단히 편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일주일에 두서너 번씩 들렀다. 청계노조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재야 민주화운동 관련 집회가 있을 때는 꼭 들렀다. 특히 인혁당사건 관련 집회 등 큰 사건이 있을 때는 꼭 들러서 의논하곤 했다.
나는 중부시장에서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시다를 하면서 온갖 잡일들을 했다. 누구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주인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대로 들락거렸다. 밖에 나왔다 들어올 때는 꼭 인절미를 사왔는데,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직공들의 시장기를 가시게 할 수 있어 좋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알고 경험했다. 전태일이 그토록 가슴 아파 했던 노동자들의 참상을 직접 볼 수 있었고, 그런데도 그 참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회적, 개인적 요인들도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한 시간인데 화장실 갔다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30분은 되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무엇보다 전태일이 자기 몸을 불살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정황도 짐작이 갔다.
중부시장에 있는 동안 나는 노동운동과 관련한 일을 많이 했다. 박문담 등 평화시장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만났지만 무엇보다 평화시장 노동자의 의식화를 위한 글을 많이 썼다.
특히 어느 평화시장 노동자의 하루생활을 수기형식으로 쓴 '인간시장'은 가장 의미 있는 글이었다. 인간시장은 민종덕을 통해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발행하던 '대화'지에 실렸는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의식화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마침 이 시기 청계노조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어 그 일에 많은 조언을 했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김혜숙, 이숙희, 민종덕 등도 자주 만났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로자 실태와 노동운동의 방향'이란 책의 원고를 써두었는데, 1977년 2월 내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는 바람에 원고를 빼앗기고 말았다. 소중한 글인데 없어져버려 무척 아쉬웠다.
그리고 김승균 선배 집에서 조영래와 심재권을 자주 만났다. 일주일에 두서너 번 만난 일도 있고, 때로는 함께 자기도 했다. 만나면 시국담이 주를 이루었지만 때로는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대학가에 뿌리기도 했다. 그런데 바둑도 많이 두었다. 바둑 두는 날이면 으레 밤을 새웠다. 지칠 때까지 두었는데, 게임의 마력은 역시 무서웠다.
김승균 선배는 이미 그때 십수 년째 피신생활을 하고 있어 피신생활이 일상생활이 되어 있었다. 4∙19때 학생시위를 주도한 이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분으로 그 열정과 끈기가 참으로 대단했다.
그래서인지 형수씨가 학보사 주간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살아가면서도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보고 배울까 두려웠는데, 결국 보고 배운 것 같다. 어쨌든 우리들은 내 집보다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두 분의 민주화열정 못지않게 무던한 성격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아내 될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삼십을 넘긴 나이라 장가 가라는 성화는 대단했지만 장가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장가 가고 싶어 중이 되는 것도 포기한 사람이었지만 장가 갈 형편이 못 됐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김 선배가 시간이 나면 자기 집에 저녁이나 먹으러 오라 해서 갔더니 어떤 처녀가 와 있었다. 형수씨 후배라 했다. 함께 저녁을 먹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두 사람이 결혼하면 꼭 맞겠다고 입을 모았다.
결혼과는 별개로 일단 겉으로 보아 마음에 들었다. 짓궂은 농담에 대처하는 여유도 돋보였다. 농담 그만하라고 윽박지르긴 했지만 속으론 싫지 않았다. 차츰 나이와 경력, 가족관계 등을 알게 되면서 나로서는 싫어할 것이 전혀 없었다. 나에 대해서는 이미 대충 설명해 두었을 것 같았다.
김 선배와 형수씨는 그 자리에서 확답이라도 받고픈 듯 계속해서 다그쳤다. 농담으로 받아넘기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아마 양쪽의 속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가 보기로는 처녀 쪽은 무반응이었으나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상당한 정도의 답을 받아 두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나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든 저렇든 나는 완전히 시치미를 뗐다. 농담으로 치부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면밀히 따져 보았다. 일단 오늘 밤은 농담으로 넘겨놓고 시간을 두고 생각하기로 했다. 피신이라는 특수상황에 있던 나로서는 보안문제 등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밤을 새며 각종 전략을 짰는데, 중신애비마저 모르게 해야 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그날로부터 꼭 21일 만에 결혼답변을 받아냈다. 얼마나 간장을 태우는 나날이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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