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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나눔-희망이 곁에 있습니다] <79> 윌슨병과 싸우는 정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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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나눔-희망이 곁에 있습니다] <79> 윌슨병과 싸우는 정민이

입력
2009.12.11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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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해맑았다. 반달모양으로 벌어진 입은 아이의 웃음을 더 환하게 해줬다. 그것이 장애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어 어 어" 의식의 자투리를 담은 입안의 숨결이 끝내 말이 되지 못하고 바깥으로 새나올 무렵에서야, 들이킨 요구르트를 반 넘게 웃옷에 흘리고도 입을 다물지 못할 때에서야 비로소 녀석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었다.

11세 소년 정민(가명)이. 또래처럼 게임기 닌텐도에 열광하고, 친구들과 코피 터지도록 싸우기도 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미술과 만들기(공예)에 소질과 관심이 많았던 녀석은 반년 넘게 손을 놓고 있다. 아니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식탐이 많았던 녀석은 음식을 입으로 나르는 팔의 통증, 잘 다물어지지 않는 입의 반항과 버겁게 싸우고 있다.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9일 녀석이 투병 전에 다녔던 공부방(경기 평택시 가나안 지역아동센터)을 엄마(이정자ㆍ35)와 함께 오랜만에 찾았다. 녀석이 답을 못하니 그간의 사정을 엄마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하루하루가 달랐다"는 사건의 시작은 올 4월로 거슬러올라간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아들의 팔목 뼈가 금이 갔는데, 병원에선 다른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그 해 겨울부터 손을 떨고(엄마는 그게 버릇인줄만 알았다고 했다), 말도 조금 어눌해진 게 신경이 쓰였으나 팍팍한 생계 탓에 눙쳐두고 있던 차였다.

동네병원에선 병명을 몰랐다. 서울 큰 병원을 찾아 뇌 자기공명영상 촬영(MRI)을 했다. '윌슨병'(Wilson's disease)이란 진단이 나왔다. 몸 속에 쌓인 구리(Cu)성분이 정상적으로 배출되지 않고 간과 뇌에 쌓여 근육마비, 언어장애(얼굴의 운동이상), 신경질환(정신분열이나 인격변화) 등을 일으키는 희귀한 난치병이다.

우리나라에선 3만6,000명당 1명꼴(2006년 기준)로 발병한다. '가뜩이나 힘든 우리에게 왜 하필…' 하고 엄마는 풀썩 주저앉았지만 이내 다시 일어섰다. 여섯 식구의 가장인 자신마저 무너질 상황이 못됐다. 설상가상, 아들의 투병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씨의 남편(37)은 지난해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일군 사업(기름가게)을 접은 뒤 얻은 후유증이다. 매달 400만원에 달하던 벌이는 지난해 5월 0원이 됐다. 남편은 병원을 오가는 거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실패의 충격이 남편을 제대로 옭아맨 셈이다.

이씨는 남편과 세 남매를 거느리고 시아버지 혼자 사는 시댁으로 집을 옮겼다. 지난해 6월부터 식당 일을 나갔다. 매일 12시간이 넘는 노동과 한달 두 번의 휴무, 장사가 잘되면 월 150만원을 받았지만 90만원 벌이일 때도 있었다. 입에 풀칠하기 바빠 아이들이 학교에 헤진 옷을 입고가도 마음만 아파할 뿐이었다.

아들의 상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병명을 안 뒤부터 병증은 더 심해졌다. 침을 흘리고 밥도 반 넘게 흘렸다. 글씨 쓰는 것도 힘들어하더니 잘 걷지도 못했다. 겨우 남편을 설득해 번갈아 가며 아들의 등하교를 도왔다. 10분이면 닿는 학교가 늘 40분 거리였다. 아들의 통증을 줄이려면 수시로 팔다리를 주물러줘야 하는데 일에 매인 탓에 밤늦게 잠깐이었다. 상태가 심각했던 지난해 여름엔 일주일 병원비만 200만원이 나왔다.

무엇보다 아프기 전 녀석은 엄마의 든든한 분신이었다. 1분 먼저 난 덕에 장남이 된 녀석은 쌍둥이 동생과 여덟 살 어린 여동생을 보살폈다. 설거지 빨래 청소 밥 차리기도 도맡았다. 엄마는 "의젓한 아들이라 의지가 됐는데 지금은 너무 힘들다"고 했다.

여기까지 듣던 녀석이 엄마의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웅얼거렸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부단히 애썼다. "힘들고 창피해서 저 외에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하려고 시도를 잘 안 해요"라는 엄마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정민이가 엄마의 휴대폰을 열었다.

녀석이 손가락으로 자판을 조심스럽게 꼭꼭 눌렀다. 휴대폰 화면엔 '엄마 효도할게'라는 글이 찍혔다. "힘들다"는 엄마의 넋두리가 영 맘에 걸렸나 보다. 녀석이 의사표현을 휴대폰 자판으로 한다는 새로운 사실도 그때 알았다.

내친 김에 녀석과 직접 얘기를 나눴다. 기자가 물으면 정민이가 휴대폰에 문자를 찍어 보여주는 식이었다. 답은 더디고 짧았다. '띠 띠 뚜 뚜' 차가운 기계음이 녀석의 따뜻한 마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기자: 무슨 효도?

-정민: 엄마 다리 주물러주기, 집안 일 돕기. (밤늦게 돌아와 자신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는 엄마한테 늘 미안했나 보다)

-기자: 뭐가 힘드니?

-정민: 장애인이라고 놀리는 애들. (엄마는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녀석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서글프다)

-기자: 그래도 엄마가 있잖아, 엄마 좋지?

-정민: 일을 많이 하니까 좋아. (아이는 엄마가 가장역할을 하는 게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기자: 설마 엄마가 싫을 때도 있어?

-정민: 먹을 거 안 사줄 때. (엄마는 형편이 어려워서 아이들 야식을 잘 못 챙겨준다고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녀석은 투병 이후 구리성분이 많이 들어간 초콜릿이나 해산물, 말린 과일 등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더 악화할 뿐이다.

-기자: 먹고 싶은 게 많겠다. 나으면 뭐하고 싶니?

-정민: 만들기, 공부. (공부방에서 마지막 공예수업을 하던 날 녀석은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지켜보기만 했다) 곁에 있던 공부방 천지영 교사는 "적극적인 성격이라 수학문제는 꼭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고, 다른 과목도 공부방에서 제일 잘했다"고 했다.

듣고 있던 엄마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다. 더구나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고 여겼는데, 이곳 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수없이 내밀었다. 교회에선 옷가지를 지원했다. 정민이 담임선생님은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을 소개해줘 언어치료를 할 수 있게 해줬고, 공부방에선 굿네이버스와 연결해 하나투어가 기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투어의 기금은 엄마의 바람처럼 서울에 올라가 재활치료를 받는데 쓰일 것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녀석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것. 윤희정 언어치료사는 "표현력과 이해력은 또래와 같아 구강운동 위주로 치료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간에 쌓인 구리성분은 약 덕분에 많이 빠졌단다. 하지만 조금만 치료가 늦어도 장애가 남고, 평생 약을 달고 살아도 90%만 회복될 수 있다는 병이다. 아이의 재활을 더는 늦출 수 없는 이유다.

-기자: 수학은 늘 100점이라며, 꿈이 뭐니?

-정민: 마술사.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자유로운 손놀림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마술사의 출현을 엄마와 공부방 교사, 하나투어, 그리고 정민이를 아는 모든 사람은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정민의 낯빛은 여전히 온유했다.

▦정민이 같은 국내 저소득가정 아동을 도우려면? 후원문의 굿네이버스(02-6717-4000, nanum1004.org)

평택=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하나투어의 사회공헌 활동

'하나되는 지구세상.'

국내 여행문화를 선도하는 기업에 걸맞은 하나투어의 사회공헌 슬로건이다. 수익의 일부로 마련한 이웃사랑기금은 희망여행, 장학사업, 소외이웃 돕기 등 특색 있고 다양한 나눔에 쓰이고 있다.

'희망여행프로젝트'는 저소득층 아동과 청소년이 어려운 환경을 딛고 미래를 향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여행을 지원한다. 돈도 없고 거리도 먼 탓에 다른 도시를 방문해본 적이 없는 소외계층 아이들은 말 그대로 희망여행을 누리게 된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전국 32개 단체, 900명 남짓의 아동과 청소년이 아름다운 동행을 했다. 물질적 지원을 넘어 정신적 문화적 지원을 해주는 나눔의 본보기다. 올해부터는 저소득층 다문화 가정으로도 범위를 넓혔다.

그늘진 구석도 촘촘히 비추고 있다.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에도 봉사활동이 필수 이수과정으로 포함됐을 정도. 올해는 '하나투어임직원희망봉사단'을 정식 창단해 굿네이버스와 희망나눔협약을 맺었다. 산발적인 봉사활동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의지다. 야구장 체험, 아쿠아리움 나들이, 암벽등반체험뿐 아니라 본사 인근 지역(서울 종로구)에선 사랑의 쌀 나누기, 급식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굿네이버스의 100원의 기적 캠페인, 희망트리 캠페인, 온라인 콩 저금통 등에 임직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세계 빈곤아동퇴치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투어챌린저(Tour Challenger) 장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미래 관광산업의 중심이 될 대학생들에게 넓은 세계를 직접 다녀볼 기회를 줘 글로벌 투어리즘의 비전을 제시토록 한다는 취지다.

고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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