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과학계에선 융합이 대세다.
예전 과학자들은 수십 년간 한 우물만 파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자신의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와의 공동 연구가 자연스러워졌다. 타 분야의 과학 이외에 문화 예술이나 인문학처럼 아예 다른 영역과의 협력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최근 이 같은 흐름에 대해 예술계와 산업계뿐 아니라 과학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융합의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예술계와 과학계 티격태격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사비나미술관은 지난달 11일 한국과학창의재단에 팩스로 공문을 보냈다. 11월 3∼8일 열린 '2009 과학과 인문·예술의 만남' 전시회에 대한 예산 집행을 중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전시회는 과학창의재단이 6월 시작한 융합문화사업의 일부 성과물을 공개하는 행사였다.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과학 융합 작품들이 전시됐다.
융합문화사업에 선정된 사비나미술관은 별도의 예산을 지원받기로 하고 전시회 진행에 참여했고, 이에 따라 큐레이터 인건비와 전시 기획비, 작품 운송비와 설치비를 포함한 예산안을 9월 제출했는데 전시회 전까지 3차례나 수정되면서 전시 진행에 혼선을 빚는 바람에 공문을 보내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
이에 대해 최연구 과학창의재단 융합문화사업실장은 "미술관이 제출한 예산안 가운데 공공기관의 특성상 집행이 어려운 항목(큐레이터 인건비와 기획비)을 조정하는 절차였다"고 말했다.
2006년부터 해마다 과학과 예술 융합 전시회를 해 온 이 미술관은 큐레이터의 기획력과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재단은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선 규정에 따라 예산을 배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술계와 과학계의 시각 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미디어아티스트인 안광준 한성대 미디어컨텐츠학부 교수는 "예술계와 과학계 모두 융합을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융합이 더 원활히 이뤄지려면 (양쪽의 특성을 반영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 서로의 입장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 현장의 요구는 스페셜리스트
대학에서도 융합은 화두다. 2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2009년 한국공학한림원 정책발표회에 모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와 관련,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다.
서문호 아주대 총장은 "이른바 '제너럴 엔지니어'를 키우는 곳이 대학"이라며 "학교에서 접하지 못한 나머지 지식들은 졸업 후 산업 현장에서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 이공계 대학에선 전공 학점이 줄고 부전공 복수전공 같은 제도가 생겨 다양한 분야를 두루두루 공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산업계의 시각은 좀 달랐다. 안승준 삼성전자 전무는 "최근 신입 사원 가운데선 전공을 깊이 파고들어 공부한 사람이 별로 없다"고 꼬집었다.
김기협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특임연구원도 "중소기업에 들어오는 인력은 전문성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며 "기본적 계산조차 안 되는 경우가 많아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윤종용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제너럴 엔지니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구개발에 종사하려면 적어도 (현장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은 알아야 한다"며 "이공계 대학의 전공 학점이 줄어든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부자연스러운 유행
정부가 융합을 추진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한 연구자는 "정부가 나서서 융합기술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실제로는 따로 연구하면서 융합이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김수봉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학문 간 융합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며 "외부의 역할은 융합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 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융합의 가장 큰 목적은 시너지 효과다.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 창의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진정일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연구자 각자가 다른 분야에 기여할 수 있을만한 깊이 있는 연구 능력부터 배양해야 참다운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렇지 않으면 피상적 융합에 그칠 거라는 얘기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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