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찾아왔어야 하고, 계속 오고 싶었는데, 미안하고…."
9일 '이승복 제41주기 추모제'가 열린 강원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자락 고 이승복군의 묘지. 제전 뒤편에 양복차림의 한 백발 노인이 행사 내내 어색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제례가 끝날 무렵 노인은 박용훈 이승복기념관장의 권유로 제단에 술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머리까지 빠져 더욱 초라해 보이는 이 노인은 1968년 11월 울진ㆍ삼척으로 침투해 평창군 진부면 속사초교 계방분교 2학년생이던 이승복(당시 9세)군을 참혹하게 살해한 무장간첩 120명의 일원이었던 김익풍(68)씨.
"무장공비에게 항거하다가 무참히 학살당해 자유민주 수호신으로 산화한 고 이승복군의…." 추도사가 진행되는 동안 김씨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참회의 눈물을 비쳤다.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듯, 그가 한때 살의로 가득 찼을 무장간첩이었다고 믿겨지지 않았다.
김씨는 "진작 찾았어야 했는데 이제야 오게 돼 미안하다"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잔을 따랐다"고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김씨는 이미 박관장의 권유로 10월22일 혼자서 이승복 묘지를 찾아 속죄의 잔을 올렸다. 당시 박관장이 공식추모제에 찾아와 유가족에게도 용서를 빌라고 해 이날 오게 된 것.
김씨는 행사가 끝난 뒤 승복군의 형 학관(56)씨 내외에게 용서를 빌었다. 학관씨는 "용서고 뭐고 있느냐. 다 지난 일이다"며 김씨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김씨는 "용서해 줘서 감사하다. 가족이나 사회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고인의 유언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가능하면 시간을 내 이곳을 자주 찾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학관씨도 어렵게 발걸음을 한 김씨에게 "세월이 무상하다. 앞으로 살면서 어려운 일이 많을 텐데 지난 일은 잊자"며 용서의 마음을 전했다. 41년 만의 화해였다. 학관씨는 "그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느냐. 국가와 이념, 지시에 따라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도 이념의 또 다른 희생양 아니겠느냐 "고 말했다.
사건 당시 15살이었던 학관씨도 공비들이 머리에 난도질을 해 죽은 것으로 알고 퇴비장에 버려졌다. 어느덧 중년을 넘어선 학관씨는 "세월이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학관씨의 머리에는 아직도 여러 갈래의 칼 자국이 나 있다.
당시 학관씨 가족은 7명이었으나 승복군 등 동생 3명(9세, 7세, 5세)과 어머니가 살해됐고, 아버지와 할머니는 동네 사람 집에 가 있어 화를 면했다. 할머니는 작고하고 아버지는 학관씨가 모시고 산다.
김씨는 울진ㆍ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때 남침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 120명 중 마지막 잔당으로 울진에서 자수했다. 1980년대에는 반공강연 등의 활동을 했으나 현재는 경기도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학관씨 가족을 직접 살해하지는 않았으며, 살해에 가담한 간첩들은 모두 소탕됐다.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대한민국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원 150명은 김씨의 생활고를 알고 100만원을 모금해 전달했다.
평창=곽영승 기자 yskwa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