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기름을 묻혔으면 묻혔지 농사는 안 지으려고 했어. 부모님이 죽도록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를 보니 농사는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기술이민 가려고 중장비 정비 기능사 자격증까지 땄었다니까."
강원도 철원에서 '오대쌀'을 재배하는 최정호(57)씨는 젊은 시절 자신이 농사를 지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강원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쌀농사 노하우를 축적하고, 농업인으로는 드물게 산업포장(2006년)까지 받게 된 이유는 뭘까. 이런 성공의 중심엔
'농사는 노동이 아니라 철학과 경영'이란 그의 독특한 믿음이 자리잡고 이씨다.
그에게 농사란?
"당시 농촌 사람들은 일만 열심히 하는 단순노동자였지. 그 시절 농촌에 무슨 '경영'이 있고 '철학'이 있었겠어. 신문이나 책에서 본 기업의 경영개념을 농촌에 적용하면 이것도 돈이 되겠다 싶어 시작했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기업들의 모습을 통해 '경영'에 대한 개념이 어렴풋하게 잡힐 때쯤 최씨는 고향을 떠나 강원 철원으로 향했다. 그가 철원을 택한 이유는 3년여의 이곳 군생활에서 철원만의 '비교우위'를 발견했기 때문.
그가 파악한 철원은 ▦민통선 이북으로 토지확보비용이 저렴한 곳 ▦들판이 비무장지대에서 흘러온 깨끗한 물로 넘치는 곳 ▦공장 하나 없어 땅이 깨끗하고 비옥한 곳이었다.
'규모의 경제'을 실현하고 당시엔 개념도 생소한 친환경 농산물을 기르기엔 철원이 적지였던 셈인데, 보통사람이라면 도저히 생각해내기 힘든 과학적 '입지'분석이었다.
현재 20ha의 논을 경작하고 있는 최씨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분명한 목표를 잡고 강한 추진력으로 밀어 붙인 결과"라며 "정부도 큰 그림을 그린 뒤 농촌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실패도 많았다. 남 따라 젓소, 한우 송아지에 손을 댔다가 가격 폭락으로 나앉던 일이나, 철원에서 인삼을 재배하다 죽을 쑨 일, 보신탕용 개를 키우다 88서울올림픽 직전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 쪽박을 찬 일 등.
그저 "돈이 된다"는 소리에 시작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근시안적이고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일은 빚과 상처만 남긴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한다.
공부 또 연구
강원 철원의 강점을 파악하고 시작한 벼농사는 달랐다. 냉해에 강해 강원도 곳곳에서 재배되고 있던 '오대벼'를 철원 평야에 심기 시작한 것.
최씨가 바로 밥맛 좋기로 유명한 철원 오대쌀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키운 장본인이다. 최씨는 "지난해와 올해 과잉생산된 쌀로 전국의 쌀 농가가 비명을 지를 때도 철원 오대쌀은 괜찮았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재배되는 오대쌀이지만 철원산(産)이 유독 빛을 발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곳 사람들의 각별한 노력이 컸다.
최씨는 "쌀 품질은 외부 종자의 혼입을 막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비싼 돈을 주면서까지 농사 잘 짓는 농가 한 곳에서 순수한 종자만 증식시키도록 했다"고 말했다. 종자 증식 전용 포장(圃場ㆍ논)을 따로 운용한 게 15년 이상 일정한 미질 유지 비결이라는 것.
이런 종자증식을 통한 오대쌀의 품질개선 과정에서 농협의 지원도 컸다. 또 철원농협이 100% 계약을 맺어 생산한 뒤 판매하고 있어, 판로 확보에도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최씨는 지난 2001년 '철원쌀연구회'라는 연구모임도 결성했다. 하루 종일 땅만 봐서는 농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최씨는 "농사꾼들이 감히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모았던 것"이라며 "농업의 정책, 기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고 토론을 벌여 농업인들에게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철원쌀연구회 30여 회원은 현재 분기마다 강의 외에도 선진국과 타 지역의 벼 재배기술 평가, 밥맛평가 등을 통해 쌀 품질을 끌어 올리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좋은 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철원=글ㆍ사진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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