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들은 시간이 자유롭다. 방학도 있고 평상시에도 시간 운용은 자기 스스로에 달려있다. 이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활동의 반경과 깊이가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학교수들의 현실참여 기회가 넓게 열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1976년 중앙대 교수로 전직한 뒤 신문 잡지 에 대한 기고, 텔레비전 출연, 기업과 정부 등 각 기관에서의 강연을 통해 사회현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나는 거의 모든 전국일간지와 유력월간지에 기고했는데 이들 매체에 게재된 칼럼 대담 논단 등을 모두 합한다면 아마 수백 편이 넘을 것이다. 내가 애독해온 한국일보에도 많이 기고했는데 특히 IMF 외환위기 전후의 경제 고정칼럼은 당시 정책결정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경제학회 세미나 또는 경영 관련 세미나에도 발표 또는 토론자로서 적극 참여 했다. 예컨대 오랜 역사를 지닌 능률협회나 인간개발연구원의 각종 세미나에서 나는 발표자로서 가장 많이 참여한 사람 중 하나였다.
77년 3월부터 약 3년간 나는 서울신문 비상임 논설위원으로서 경제사설을 썼다. 이 때 <세대(世代)> 라는 종합월간지가 있었는데 나는 여기서 77년 1월부터 매월 경제 고정칼럼을 쓰고 있었다. 세대(世代)>
당시 고정칼럼은 서울신문 편집국장이던 남재희씨(국회의원, 노동부 장관)가 정치 분야를,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신동호씨(스포츠조선 사장)가 사회분야를 썼고 김학준 서울대 교수(동아일보 사장)가 '소련의 이해'라는 연재물을 쓰고 있었다. 그 뒤 남재희씨가 서울신문 주필이 되어 나에게는 경제사설을, 김학준씨에게는 정치사설을 써달라고 한 것이다.
이 때는 유신말기여서 암울한 시기였다. 더구나 서울신문은 정부기관지여서 정치나 사회 쪽에서는 사설을 쓸 입지가 매우 좁았으며 그래서 나는 매주 4~5회 사설을 써야 했고 매주 한 두 번은 통단으로 써야 했다. 한국일보 출신의 김종규 사장은 원만하고 경영능력이 탁월한 분이었고, 주필 남재희씨는 폭이 넓고 균형 감각이 있는 지성이어서 분위기가 좋았다.
집필이 끝나면 남재희씨와 김학준씨 그리고 사회사설을 쓴 유승삼씨(서울신문 사장)와 문예칼럼을 쓴 박갑천씨(작고) 등 우리 일행은 모두 무교동 낙지 집으로 옮겨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담론을 나누기도 했다. 경제사설을 쓰면서 나는 경제와 정치의 관계 그리고 이론과 실제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글을 빨리 쉽게 쓰는 방법도 터득했다.
84년은 내가 중앙대학에서 정경대학장의 직을 맡은 해인데 이 무렵부터 나의 교내외 활동이 한층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나는 각종 정부의 정책자문 기구에도 참여 하게 되었는데 금융제도 심의위원, 사법고시위원, 외무고시위원, 중앙노사공익위원, 산업정책심의위원, 외자심의위원, 세제심의위원, 농정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85년에는 제6차 5개년 계획 조정위원장의 직을 맡아 민관 조정위원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5개년 계획의 내용을 총괄 조정하는 일을 맡아 했다.
이러한 정책자문과 관련하여 나와 특히 가까운 관계에 있던 분으로는 박봉환씨(작고)와 장덕진씨(농수산부 장관)가 있다. 박봉환씨는 중화학 기획단장과 동자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어려운 과제가 있을 때마다 내게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장덕진씨는 68년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부터 정책협의를 위해 자주 만났는데 특히 그 분이 경제기획원 차관과 80년대 초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으로 있을 때에는 많은 정책문제들에 대해 내게 자문을 구했다.
그 가운데 금융제도 개편문제와 사회복지제도 개혁안 등은 내가 용역을 맡아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84년에는 이 분이 농업진흥공사 이사장이 되었는데 나를 비상임 이사로 위촉해 함께 일한 일도 있다.
86년 나는 한국국제경제학회 제9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 학회는 77년에 서울대 조순 교수(서울시장, 경제부총리)를 초대 회장으로 하여 창립하였는데 한국경제학회와 쌍벽을 이루는 학회였다. 이 학회는 봄에는 서울에서 여름에는 지방에서 학술대회를 열고 국문학술지와 영문학술지도 펴내는데 이런 일을 뒷바라지 하고 그 예산을 조달하는 일이 큰 짐이었다.
86년 1월에는 뜻밖에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은행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다시 친정으로 가는 느낌이어서 매우 기뻤다. 이 때 한은 총재는 최창락씨에서 박성상씨로, 재무장관은 김만제씨에서 정인용씨로, 은행감독원장은 정인용씨에서 이원조씨로 바뀌고 김만제씨는 경제부총리가 되었다.
당시 금융통화위원은 비상임이어서 대학에 근무하면서 매주 목요일에만 나가면 되었는데 위원으로는 부광식 경북대 교수, 김일곤 부산대 교수, 전철환 충남대 교수(작고), 김익현 조선대 교수(작고), 김병주 서강대 교수, 구본호 KDI 원장 그리고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정춘택씨 등이었다.
그 때는 무역흑자와 경기호황으로 통화가 팽창하여 물가가 위협 받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금통위에서는 주로 통화를 긴축하고 경제를 개방하며 외환관리를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은행에서 차량이 나왔지만 나는 회의 때만 이용했다. 한국은행의 자료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유익하고 정교하여 경제공부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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