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암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 국사봉(614m) 중턱에 자리잡은 신(新) 유토마을. 새 고향을 찾아나선 귀농인들이 50년 넘게 버려졌던 땅을 사들여 일군 토종약초마을이 최근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참 살기 좋은 마을 콘테스트'에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최우수 마을로 뽑혔다.
지난 4일 오후 신 유토마을 탐방에 나섰다. 영암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장흥 방면으로 14Km 가량 가다 보면 왼편으로 국사봉 등산로를 조금 지나 작은 샛길이 나온다.
이정표도 없어 자칫하면 놓치기 십상인 이 길이 마을로 향하는 일명 '유토길'이다. 비포장도로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다. 지난해부터 입소문이 나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들이 늘면서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마을 이름을 '유토피아'에서 따온 게 아닐까 싶었는데, 실은 느릅나무가 많은 땅(榆土ㆍ유토)이란 뜻의 옛 마을 이름이란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 들어선 순간, 펼쳐진 풍광은 '유토피아'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아담한 폭포와 대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소리는 길손을 맞는 한 편의 음악 같았고, 암석 위에 설치한 전망대에 오르자 활성산(498m)의 서광목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대나무 숲 사이로 희고 붉은 단층 벽돌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가꾸는 약초단지와 약초황토방, 도회에 내다팔 전통 된장, 고추장을 가득 품은 300여개의 장독이 빼곡히 놓인 장독대, 주민들의 쉼터이자 길손들이 하룻밤 묵어가는 사랑방 노릇까지 하는 마을회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자리한 모습은 '청정농촌'이란 마을 표지판이 허투루 쓴 말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마을 대표 박말녀(52ㆍ여)씨 가족 등 세 가족이 이곳에 새 둥지를 튼 것은 2003년. 교통사고로 1급 지체장애인이 된 박씨의 딸(25)을 비롯해 모두 장애인이 있는 가족이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던 이들은 우연히 찾은 이곳의 풍광에 반해 정착을 결심했다.
국사봉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전남 총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옛 유토마을도 전쟁의 참화를 피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마을은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초토화돼 주민들은 도망치듯 고향을 등졌고,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됐다. 아랫마을 사람들도 귀신이 나온다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싼 값에 땅을 사들인 이들은 산을 깎아 집터를 다지고, 끊긴 길을 연결하고, 전기를 들이고, 지하수를 팠다. 맨손으로 폐허를 일구는 일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천막을 지어놓고 살다가 뱀이 나와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공사 중에 다리가 부러지거나 지네에 물린 사람도 숱하게 있었지요." 박씨는 이런 고생보다 속 사정도 모른 채 "먼(무슨) 죄 짓고 농촌에 왔소", "혹시 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 아닌가" 하는 이웃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마을에 정착한 지 3년째, 박씨 남편은 "이곳에 살기 싫다"며 집을 나갔다. 시어머니(82)와 장애인 딸을 혼자 떠맡게 된 박씨는 한때 "다 같이 죽자"는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딸이 조금씩 건강을 찾아가는 것을 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뇌사상태였던 딸은 이제 더듬더듬 말도 할 정도로 회복됐다.
현재 마을 주민은 9가구 22명. 대부분 서울 등 도심에서 새 삶을 찾아 나선 이들로, 다른 농촌과 달리 평균 연령이 30대 후반이다. 특히 양지영(37) 행임(34) 자매와 서수영(38), 조정운(36), 정희재(39)씨 등 억척아줌마 5인방의 활약이 크다.
이들은 미용사, 학원강사, 공무원 등으로 일하는 남편들이 인근 장흥 등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 마을 살림을 도맡아 꾸려가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씨에서 알곡까지'란 이름의 토종약초연구회를 만들어 마을에 자생하는 곰보배추 등 토종약초 10여가지와 된장, 고추장, 감식초 등 웰빙약초 가공식품 20여가지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 지역축제에 참가해 2,00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또 독거노인, 장애인 등을 위한 봉사활동도 벌인다.
양지영씨는 "아이의 아토피 증세가 이곳에 온 뒤로 깨끗이 나았다"면서 "마을 가꾸기며 아이들 공부 봐주기 등을 주민들이 모두 함께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이웃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현재 마을 곳곳에선 새 이웃이 될 20여 가구를 위한 집 짓기 공사가 한창이다.
다양한 직업군과 젊은층, 장애인 등을 우선 선발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더 많은 이들을 맞기 위해 주변 산 개간 계획도 갖고 있다. 박씨는 "지난 여름 옛 유토마을 출신이라는 초로의 남자가 아이들과 함께 귀향하고 싶다고 해 승낙했다"고 귀鄂杉?
박씨 등 신 유토마을 사람들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70대가 청년의 일을 하고, 아이들 울음소리가 사라진 농촌의 현실을 바꾸고 싶어요. 자립심 강하고 사랑이 가득한 마을, 지나는 길손들도 마음 푸근하게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정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어 갈 겁니다."
영암=글·사진 박경우 기자 g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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