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이란 도학(道學)의 학통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로 이어지는 송대의 주자학통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자학은 원 지배 당시 고려에 전파되었다.
그 후 주자학은 조선왕조의 지배사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묘에 종사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이제현(李齊賢)ㆍ이색(李穡)ㆍ권근(權近) 등 관학파들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사림파가 대두하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淑子)-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도학계보(朝鮮道學系譜)가 거론되었다. 이 때는 절의(節義)가 기준이었다.
그리하여 1517년(중종 12)에 절의의 대표로 정몽주가 일차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짖고 사장(詞章)에 편중되어 있다고 제외되었다. 제자인 김굉필이 바로 사장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퇴계도 동의했다.
퇴계는 조광조와 이언적(李彦迪)을 추천했다. 조광조는 재주와 기국이 뛰어나고 지치주의를 했다는 이유로, 이언적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추천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행실은 그만하면 좋으나 학문적 업적이 너무 빈약하다고 비판했다. 조광조조차도 학문이 깊지 못하고 조급한 개혁으로 실패했다고 비평했으나 그만하면 지치나 행실이 문묘에 종사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율곡은 이언적이 을사사화에 재판관을 지냈으니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퇴계는 조광조와 이언적의 행장을 자진해 짓고, 거기다가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 김굉필의 친구인 정여창까지를 넣어 4현종사를 주장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훈구파들이 물타기로 넣자고 해 4현에 든 것이다.
그러나 선조 대에 이르러 동서분당과 임진왜란 때문에 문묘종사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그리고 선조의 방해공작으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문묘종사가 왕권의 약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계가 죽자 4현종사는 5현종사로 바뀌었다. 5현종사는 이제 중앙관료들뿐 아니라 지방 유림들까지 들고 일어나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적자도 아니요, 장자도 아닌 광해군은 이러한 사림의 집단적인 요구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1610년(광해군 2) 7월에 드디어 5현종사가 실현되었다. 조선도학계보가 제시된 지 100년, 퇴계가 죽은 지 40년만의 일이다.
그 결과 퇴계의 이론이 정통이론이 되고 이와 다른 사상이나 이론은 이단으로 몰려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무속, 불교, 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육왕학, 기학, 상수학등 유학의 다른 학파들도 배제되었다. 다시 말하면 퇴계학이 국가이념의 주류를 이룬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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