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인제군의 관문인 정중앙휴게소. 시외버스를 내리면 조형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 출신인 시인 박인환의 모습을 음각으로 새긴 브론즈 조각이다. 그 앞에는 막걸리 주전자 조각이 놓인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박인환과 마주앉아 그의 시 '목마와 숙녀'를 읽을 수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박인환기념관 예정지까지 걸어가는 10여분은 박인환의 시 세계를 시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천장이 달린 벤치에 누우면 구멍을 뚫어 글씨를 새긴 시 '세월이 가면'을 읽을 수 있고, 놀이터 가장자리에는 사람이 지나가면 박인환의 시 15편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나무 모양의 조형물이 놓였다.
이 마을 50가구의 대문 앞에는 시화 문패가 달려있다. 박인환거리 조성 프로젝트를 맡은 '분주한 상자' 소속 미술작가들이 지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미술놀이 프로그램에 나온 그림과 백일장 당선작이 어우러진 문패들이다. 조각가 이원경씨는 "미술과 문학의 만남을 통해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고자 했다"면서 "아이들의 참여도가 높아 프로그램 진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교, 공원, 피난민마을의 변신
박인환거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 20억원의 예산을 들여 한국미술협회 등과 벌인 공공미술 진흥사업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지난 3월부터 공모를 통해 21팀을 선정, 현재는 모든 작업을 끝낸 상태다.
경기 남양주군 금남초등학교는 군부대와 접하고 있어 잿빛 시멘트 담장과 철망으로 운동장이 막혀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새, 자동차와 우주선 등이 알록달록하게 그려졌고, 동물 모양의 벤치도 자리잡았다. 이곳 거주 작가 5명이 작업을 맡았다. 창고로 쓰이던 컨테이너 박스는 학생과 학부형들이 함께 그린 타일 벽화로 장식했다. 이 학교 강병동 교장은 "아이들이 '학교가 화장을 했다'며 좋아한다. 정서 발달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 양평군의 갈산공원은 미술산책로로 꾸며졌다. 물고기와 물방울, 어린이 등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조형물에는 스테인리스 관이 설치돼 실로폰처럼 연주도 할 수 있다. 낙서로 뒤덮였던 전망대에는 아예 공책 형태의 낙서장 조형물을 설치해 낙서를 미술작품의 일부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로 형성된 부산의 대표적 낙후지역 감천2동 일대의 경우 '부산의 마추픽추'라는 테마 아래 산중턱 마을 곳곳에 조형물이 설치돼 벌써부터 이색 볼거리로 소문이 났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몰리면서 지역 주민들도 활력을 찾고 있다.
사후 관리, 장기 프로젝트 절실
최근 몇 년 새 공공미술의 개념이 크게 바뀌었다. 단순히 커다란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의 삶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매개체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데는 2006년 문화부가 벌인 '아트 인 시티'의 역할이 컸다. 이후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등 지자체들의 공공미술 사업이 잇따랐다.
올해의 '마을미술 프로젝트'는 '아트 인 시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지역적 특성을 살린 테마 설정, 지역 주민의 동의와 적극적 참여, 작품 형태의 다각화 등으로 외부 작가들이 소외 지역에 가서 벽화를 그려주던 과거의 천편일률적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다. 작업 대부분이 해당 지역 거주 작가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과제도 적지 않다. 우선 들쭉날쭉한 작품의 질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은 공공미술로서의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보존과 관리 방안 마련도 시급하다. 과거의 공공미술 작품 중 시간이 흐르면서 방치돼 흉물이 돼버린 사례도 적지않다. 마을미술 프로젝트 추진위원장인 서성록 안동대 교수는 "전체 예산의 3%를 사후 관리비로 떼어놓긴 했지만 사업 종료 후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공공미술 사업이 1년 단위의 단발성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3년 전에도, 올해에도 작가들이 작품 제작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서너 달이었다. 문화부는 예산 확보 문제로 내년 공공미술 사업의 실시 여부, 내용 등을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다.
인제ㆍ양평=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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