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파업이 마침내 종결됐다. 기간은 길었지만 다행히 극단적 혼란도, 물리적 충돌도 없었다. 대부분의 대규모 사업장 파업으로는 대단히 이례적인 결말이다. 심지어 노조의 백기투항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아마도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단일 현안으로는 가장 깔끔하게(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마무리된 경우일 것이다. 정부는 '법과 원칙'의 고수를 원인으로 꼽았다. 득의만만해진 사측은 더 나아가 앞으로도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파업 책임을 묻겠다고 못을 박았다.
정말로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이 철도파업을 중단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전해진 현장 분위기로 가늠해봤을 때 노조의 기운을 뺀 것은 그보다는 여론의 힘이 더 컸다고 보는 것이 맞다. 파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겨울날씨만큼이나 혹독하게 차가웠기 때문이다. 불황으로 당장 일상이 힘겨운 사람들로서는 자신과 별 상관도 없는 이들의 권리다툼 따위로 생활의 불편을 감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철도파업 종결을 읽는 시각차
더구나 대부분의 국민들 생각에 공기업 종사자인 그들은 상대적으로 배부른 기득권자들이다. 그러므로 경제가 많이 좋아져 각자의 등이 따뜻하게 덥혀지기 전까지 처우가 괜찮은 대규모 사업장들의 노동쟁의는 대개 같은 여론환경에 봉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법과 원칙보다는 사회적ㆍ현실적 조건이 더 결정적이라는 뜻이다.
철도파업 사례를 길게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이번의 '개가'를 통해 자칫 잘못된 사인을 읽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법과 원칙이란 게 언뜻 철옹성 같은 불가침의 기준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또 편의적으로 쓰이는 개념도 흔치 않다. 이번 일에서 철도노조와 사측 모두가 똑같이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걸 봐도 그렇다. 노조는 쟁의절차를, 사측은 쟁의내용을 염두에 두고 그 말을 쓰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가까운 올해 초의 용산참사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정부 입장에선 법과 원칙에 따른 정당한 공권력 집행이었지만, 헌법 상 기본권인 행복추구권이나 평등권적 시각에서 보면 철거민들이 주장하는 법과 원칙의 회복도 충분히 타당한 것이다. 생전에 법과 원칙(그리고 상식)을 그토록 설파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이 바뀌자 똑같이 법과 원칙을 명분으로 내건 검찰의 수사에 치여 불행한 결과로 내몰렸던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서로 생각하고 있던 목적과 대상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신념은 같았을 것이다. 지난해 촛불시위 때도 공권력과 보수진영이 명분으로 든 법과 진보진영이 주장한 원칙 역시 용어는 같되 내용은 정반대였다. 확고한 절대기준처럼 보이는 법과 원칙이란 게 사실은 이렇게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논리다.
게다가 언짢은 것은 그 용어의 뉘앙스다. 강자가 사용하는 법과 원칙에서는 위압적이고 차가운 단절과 배제, 오만 등의 냄새가 묻어난다(약자의 같은 말에선 거꾸로 새 둥지처럼 연약한 피신처 같은 느낌이 드는 데 반해). 독선이니 오만이니 하는 단어들이 현 여권이 지난 참여정부를 비판할 때 가장 자주 동원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그도 아이러니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현안과 세종시, 4대강 등의 굵직한 현안들이 잔뜩 얽혀있는 요즘 '정면 돌파'니, '승부수'니 하는 전투적 용어들이 부쩍 많이 들리는 것 또한 잦은 법과 원칙 언급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스럽다.
더 존중해야 할 것은 타협ㆍ소통
법과 원칙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실내와 외장까지 전체를 앙상한 골재로 마무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숱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역할이 근본인 정치영역에서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번 철도파업 해결이 자칫 현 정부가 법과 원칙으로 포장한 일방주의적 경직논리에 갇히게 되는 계기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숙한 민주사회에서 법과 원칙만큼, 때로 더 존중 받아야 할 가치는 역시 타협과 소통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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