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서쪽(유럽)이 아니라 동쪽(아시아)으로 갔을 겁니다."
알렉산더 딘킨(61) 러시아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은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대국 러시아의 미래가 극동지역 개발에 달려있음을 역설하며 이렇게 말했다. 18세기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에 가까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까지 유럽화를 추진해 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들었음을 상기시키며, 300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의 활로는 동쪽으로 이동했음을 천명한 것이다. 러시아는 2012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의 블라디보스톡 개최 등을 계기로 극동지역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 국제관계연구소인 IMEMO 딘킨 소장과의 인터뷰는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한국 극동지역 균형자 돼야
"러시아 극동지역에 대한 중국의 투자가 무서울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광활한 이 곳에 한국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한국이 이 지역에서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극동지역 러시아인 인구는 600만명 내외에 불과한데다 젊은 세대가 속속 모스크바 등 산업화한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이 지역 인구는 급감하고 있다. 반면 접경지역인 중국 '동북 3성'의 인구는 1억명이 넘는다. 중국의 경제발전속도와 인구를 감안하면 러시아가 극동지역 영토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전문가들이 많은 실정이다.
딘킨 소장은 훌쩍 커버린 중국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올해 6월 신흥경제대국 브릭스(BRICsㆍ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정상들이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미국 주도 경제제도의 개혁을 한 목소리로 요구한 것을 예로 들며 "중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협력할 분야가 많은 동맹국"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1970년대까지 만해도 중국은 구 소련을 '큰형님'이라고 공식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은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지만 '동생'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미ㆍ중 양극구도는 성급한 추측
향후 미ㆍ중 양극 구도가 성립될 것인가에 대해 묻자, "20년 전에는 21세기가 되기 전에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는데, 과연 그렇게 됐느냐"고 반문했다. "20세기 이후 세계는 '미국이라는 유일 강자와 그에 대한 경쟁자'라는 구도가 유지돼 왔으며 다만 경쟁자의 배역을 맞는 국가들이 교체돼 왔다"며 "중국이 그 배역을 맡게 되더라도 과거 소련보다 훨씬 미약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다소 과열됐다고 느꼈는지 딘킨 소장은 IMEMO가 한ㆍ러 수교에 얼마나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왔는지를 회고하며 화제를 한국으로 돌렸다. 개혁ㆍ개방의 바람이 한창이던 90년 당시 수교를 놓고 양국간 물밑접촉이 활발했지만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있었다. 딘킨 소장은 이 난관 해결에 IMEMO가 적극 개입했다고 밝혔다.
IMEMO 소장 출신으로 당시 소련연방회의 의장이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에게 적극 진언해 그 해 3월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을 만나게 한 것이다. IMEMO는 셰바르드나제 장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크렘린궁의 프리마코프 의장 집무실에 김영삼 최고위원을 초대한 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우연을 가장해 프리마코프의 집무실에 들르도록 '작전'을 짰다. 이 일에 딘킨 소장도 실무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양국 수교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후일 셰바르드나제 장관이 해명을 위해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면담할 때 배석했던 당시 북한 2인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줄곧 셰바르드나제 장관을 외면했다고 말하며 딘킨 소장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러시아에 한국형 대기업 모델 도입 희망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했던 딘킨 소장은 "한국의 발전모델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 선진국은 국가주도 자본주의를 마치 타락한 자본주의처럼 생각한다"며 "그러나 시장경제 전환 이후 천연자원 수출국으로 전락한 러시아를 다시 과학ㆍ기술 강국으로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당분간 정부주도의 국가자본주의 모델 채택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과거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세계시장 진출을 주도한'재벌'과 같은 존재가 지금 러시아에 절실하다"고 말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체험한 노회한 경제학자는 좁은 국토와 빈약한 자원 등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한국인 저력의 비밀의 실마리를 한국 대기업에서부터 찾으려는 것 같았다.
모스크바=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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