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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제주 사려니숲길·물찻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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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제주 사려니숲길·물찻오름

입력
2009.12.04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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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길이라. 참 이름이 곱다.

청순한 미인과 마주했을 때의 설렘 같은 걸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사려니오름으로 가는 숲길을 줄여 말한 이 이름에서 사려니는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는 뜻의 '사리다'에서 왔다고 한다. 사려니오름의 둥근 모양에서 비롯된 말일 게다.

제주 올레길이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라면 이 길은 제주의 평원 한복판을 디디는 걸음길이다. 비자림로에서 시작, 한라산 중산간 동쪽 자락의 거대한 원시림을 종단해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총 15.5km 길이의 숲길이다.

길의 출발점은 짙은 삼나무 그늘을 드리운 비자림로(지방도1112호선)다. 옛 5ㆍ16도로(국도11호선)를 타고 가다 비자림로로 좌회전해 500m 가량 가면 길 입구와 주차장이 나타난다.

길은 차 한 대 넉넉히 다닐 수 있을 만큼의 폭이고 바닥은 걷기 좋게 잘 다져져 있다. 예전 목재를 나르느라 생겨난 이 길은 이후 버섯 재배 농가를 잇는 길로 사용됐고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숲의 기운을 담뿍 받으려는 걷기 순례자들을 위해 자리를 내줬다. 5월부터는 제주도산악연맹이 정식으로 길 이름도 붙였다.

사려니숲의 초겨울은 뭍의 숲과는 달리 그리 황량하지 않다. 낙엽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함께 뒤섞인 상록수의 푸르름으로 숲은 생기를 잃지 않았다. 나무 위쪽이 좀 휑해도 바닥을 가득 덮은 조릿대 때문에 초록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입구에서 4.5km 가량 걸었을 때 물찻오름 입구를 만났다. 제주의 360여 오름 중에 백록담처럼 굼부리(분화구의 제주말) 안에 물을 담고 있는 오름은 몇 되지 않는다. 물찻오름은 그 중에서도 사철 물이 고여 있고 또 가장 많은 물을 머금고 있다고 한다.

물찻오름은 지난 1년간 휴식년제에 묶여 입산이 금지됐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원기를 조금 회복한 물찻오름은 이제 새해 1월 1일부터 다시 일반에 개방된다. 미리 제주도 환경정책과에 양해를 구한 덕에 물찻오름을 오를 수 있었다.

오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관리인 강대수(56)씨가 앞장을 섰다. 탐방로에는 폐타이어를 잘게 쪼개 이어 붙인 고무 매트가 깔려 있다.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을 오른 지 얼마 안돼 굼부리 등성이에 올라섰다. 나뭇가지 사이로 물이 고인 산정의 호수가 보였다.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나타나선 "누구냐"소리치듯 깍깍 울어 댔다. 물찻오름을 지키는 호위병 마냥 머리 위를 떠나지 않았다.

우선 굼부리 등성이를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무 사이로 시야가 조금 열려 바라보니 말찻오름 경주마육성농장 정석비행장 등이 펼쳐졌다.

강씨는 "말굽 모양의 말찻오름은 고려 때부터 말을 몰아넣고 풀을 먹이던 곳"이라고 했다. 경주마육성농장의 기원이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오르는 것이다.

물찻오름은 제주 동부의 훌륭한 전망대 역할도 한다. 강씨는 "물찻오름서 보이는 풍경에 제주땅 3분의 1이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굼부리 동쪽 등성이의 바깥쪽은 깎아지른 벼랑이다. 약 300m 가량 이어진 벼랑을 바깥에서 보면 거대한 성벽과 같은 모습이다. 물찻의 찻은 제주서 성(城)을 말하는 '잣'에서 전해진 음절이다.

즉 물찻오름은 물이 있는 성이란 뜻이다. 물찻오름의 또 다른 이름은 거문오름이다. '거문'은 단지 검다는 의미를 넘어 제주민들이 신성한 곳에만 붙였던 호칭이다. 물이 고인 성 같은 이 오름을 오래 전부터 제주민들은 신령스럽게 여겨 왔던 것이다.

좀더 산등성이를 타고 가자 이번에는 서쪽의 한라산 자락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서너 겹의 산자락이 물결치고 그 위로 아스라이 백록담을 담은 산마루가 윤곽을 드러냈다. 거침없고 장쾌한 풍경이다. 거대한 한라산을 한눈에 담는 느낌이다.

오름을 내려와선 다시 원래 길로 돌아와 걷기를 계속했다. 붉은오름과 사려니오름으로 가는 갈림길에 월든(치유와 명상의 숲)이란 이름표가 붙은 숲이 나타났다.

짙은 그늘에서 불쑥 숲의 정령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삼나무 숲을 사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빛에서 19세기 미국 작가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노래한 숲의 생명을 떠올린다.

일반에 개방된 코스의 종점인 서어나무 숲에 이르렀을 때 해가 많이 기울었다. 어두워지기 전 숲을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에 왔던 길로 되돌아 바삐 걸음을 옮겼다.

월든에 닿을 즈음 길 위로 뛰어든 노루 몇 마리와 조우했다. 내가 노루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노루들이 나를 구경한다. 겅중겅중 숲에서 뛰노는 노루의 움직임에서 숲의 평화가 그려졌다. 인적이 끊긴 이 시간, 숲길은 노루 오소리 등 동물의 공간이 된 것이다.

다음날 새벽 다시 이 길을 찾았다. 물찻오름 산정 호수의 아침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서둘러 길을 나섰지만 물찻오름에 올랐을 때 이미 사위는 밝았다. 한라산에 걸린 큰 구름대가 물찻오름에도 드리웠다.

굼罐?안 호수에도 그 구름이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 하늘은 파랗게 깨어났지만 굼부리 안의 구름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조금씩 물에 녹아 들었다.

빗물이 고이고 구름과 안개가 녹아 이룬 산정의 호수엔 아침의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짙은 이끼 뒤덮은 나무 둥치들이 물가를 빙 두르고 있어 신령함마저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물안개가 잦아들며 거울처럼 명징해진 호수는 오름 굼부리의 등성이를 둥그렇게 비춰냈다. 그 한가운데로 파란 하늘이 풍덩 빠져들었다.

■ 여행수첩

비자림로부터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진 사려니숲길의 총 길이는 15.5km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개방된 구간은 서어나무 숲까지의 7.5km다.

나머지 구간은 산림 보호 등의 이유로 통제하고 있다. 물찻오름 입구에서 성판악으로 이어진 임도도 현재 통제 중이다. 천천히 사려니숲길을 걷고 물찻오름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4, 5시간 가량 걸린다.

비자림로 입구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월든 에서 붉은오름쪽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제주도 녹지환경과 (064)710_6762

제주=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이성원의 여행 편지/ 제주 올레길과 컵라면

제주 올레길의 인기가 높습니다.

제주에 몇 번 가 보곤 이제 더 볼게 없다던 이들도 올레길을 걷기 위해 다시 제주를 찾는다고 합니다. 올해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 600만명이 넘은 것도 올레길의 덕을 톡톡히 봤을 겁니다. 제주의 속살을 걸으며 많은 이들이 제주를 새로 발견하고, 여행의 또 다른 묘미를 깨우쳐 가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올레길의 흥행은 유행에 유독 민감한 국민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 누구도 다녀왔다는데 나도 한번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서는 이들도 꽤 된다고 합니다.

올레길을 안내했던 현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깁니다. 남들은 다 바다 쪽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하는데 서울에서 온 좀 부유해 보이는 한 신사는 반대쪽 땅만 보고 걷더랍니다.

읽어버린 지갑을 찾는 것처럼 계속 두리번거리는 신사에게 "풍경이 마음에 안 드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풍경엔 관심도 없다는 듯 "이 땅을 살 수 있나? 사람들이 많이 다녀 펜션이나 음식점을 내면 좋을 텐데…"라고 되묻더랍니다. 그 제주 사람은 "역시 돈 모으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혀를 찼습니다.

무작정 올레길이나 사려니숲길을 찾았다가 화만 내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왔는데 일반 관광지와 달리 다리 아프게 걷기만 하니 짜증이 날 법도 합니다.

사려니숲길을 찾은 어떤 일행은 "죄다 똑같은 나무만 있는 숲이 뭐 볼게 있냐"투덜거리고는 "커피 뽑을 자판기도 없고 컵라면 파는 가게도 없는 곳이 무슨 관광지냐"는 핀잔만 남기고 돌아가더랍니다.

여행이란 그저 화려한 것을 보고, 맛난 것 먹고, 얼큰하게 취해야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아직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인 성향도 그렇지만 한국인이 여행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올레길이나 사려니숲길을 찾는 마니아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여행 풍속이 점차 성숙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조용한 여행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올레길의 열풍이 지금 한때만 반짝거리다 시들어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제주= 글·사진 이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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