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KBS다. 국민 문화복지를 위해 묘한 사건을 만들어 퍼즐 푸는 즐거움을 주는 정신에 투철한 KBS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에게 던진 KBS표 문제는 좀 어렵다. 엉망진창인 것만큼은 분명하되 그것을 감상할 지혜와는 좀체 이어지지 않는다. 난해한 문제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는 모습이 주위에 가득하다.
김인규 사장에 반대하고 방송 장악 저지를 위한 KBS 총파업 투표 결과를 맞이하는 풍경이다. 전체 직원의 48%가 파업에 찬성하고, 41%가 반대했다. 재적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파업은 부결됐다. 파업 찬성과 반대로만 보면 이 수치를 못 읽어낼 이유가 없다. 몇몇 언론이 전하는 대로 쿨하게 'KBS 파업 반대 결론'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번만 이 수치를 꼬아 해석하면 미궁 안으로 입장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직원의 48%는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김인규 사장에 반대했다. 김인규를 반대하면서 노조를 중심으로 제대로 정치 개입 반대를 펼쳐보자는 기대를 보인 셈이다. 41%는 김인규 사장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노조의 파업에는 반대했다. 그의 취임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면서 노조에는 불신을 표한 것이다.
조직 내 한쪽은 사장을 믿을 수 없고, 다른 쪽은 노조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엉망진창이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쯤 되면 조직 전반을 휘감는 조직 정서구조란 게 형성되게 마련이다. 조직 내 개개인은 그 조직 정서구조를 읽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된다. 그에 맞추어 자신의 앞날을 점치기도 하고 행동 준거를 마련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 이 투표결과로 미루어볼 수 있는 KBS의 조직 정서구조는 무엇일까가 궁금해진다.
각자도생. 제각기 살 길을 모색하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새로이 사전에 그 뜻말을 보태야겠다. 2009년 한국의 공영방송 KBS가 택한 길이고, 또 그렇게 살아갈 길이라고. 이번 결정은 새로운 조직 정서구조를 만든 계기이기도 하지만 이미 팽배해있던 KBS 정서구조를 드러낸 지표이기도 하다.
이번 정권 들어 굳어진 정서구조이면서 앞으로의 지침이 될 각자도생으로 풀어본 KBS의 앞 날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사장을 반대했던 이들은 납작 엎드려 시간을 버는 쪽으로, 노조를 반대했던 쪽은 경영진의 지침을 조직 논리로 받아 종업원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그러면서 인지부조화가 생기지 않는 쪽으로 각자의 처지를 변명할 말들을 만들어갈 것이고.
김인규 사장 체제가 힘을 받을 것 같다는 예측, 방송은 정치 영역으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단언, KBS는 망했다는 울음 섞인 말들로 어지럽다. 갈피 잡지 못한 해석에 선뜻 이방인이 새로운 해석을 더한다. 학술대회 참가로 방한한 일본 NHK 전문가 마츠다 히로시씨가 놀라지 말라며 위로를 전한다. KBS 소식을 접하고 NHK의 판박이라며 또 한번 위로의 뜻을 전한다. 자민당 정권 하에서 일본 민주주의의 역주행에 일조를 했던 NHK와 너무 흡사한 경로를 지나고 있어 놀랄 따름이란다. 스스로 개혁해야 할 책무를 진 이들이 책무는 던지고 살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마츠다씨는 이제 책무를 그들로부터 거두어 시민이 지는 수밖에 없지 않냐고 조언한다. 일본 시민사회는 그 책무를 방기했지만 이제껏 공영방송을 위해 동분서주해온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기대를 걸 만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있는 시민사회에 쉽게 짐을 지우는 그의 목소리가 밉기는 하지만 그것밖에 도리가 없다는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부담 주고 수신료 받는" KBS에 더 이상 무슨 기대를.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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