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엄마!" 몽골 출신의 버드 바야마(43)씨는 아직 '엄마'라는 말을 꺼내기가 수줍은 듯 했다.
편지를 읽는 목소리는 기어들어갔고, 이마엔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인연을 맺은 지 1년도 채 안되는 '엄마'. 그러나 가슴 속에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마움이 뭉클거렸다.
"정말 많이 사랑해요. 엄마가 건강해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 더 행복해져요." 버드씨가 간신히 말을 끝내자, '친정 엄마' 양화자(72)씨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힘껏 박수를 쳤다. 70대 황혼녘에 맞은 첫 딸의 고백에 붉어진 눈시울을 애써 감추기라도 하듯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청 4층 시청각실.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한국인 엄마' 5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마음을 담은 카드를 주고 받았다.
이들은 마포구청이 올해 3월 결혼이주여성들의 한국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마련한 '친정엄마 맺어주기' 행사를 통해 만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피부색도 다르지만 어느덧 이들은 "많이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사랑해요 엄마" "엄마가 바빠서 시간을 많이 못내 미안해. 사랑한다 딸아" 등 애틋한 모녀지정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버드씨와 양씨도 마포구청을 통해 올해 처음 만났다. 모녀 결연을 맺긴 했지만, 버드씨는 처음에 그저 서먹하기만 했다. 한 번은 집으로 쌀이 배달돼 왔는데, 도무지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양씨에게 전화를 걸자 "쌀 잘 받았니?"라는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버드씨가 비로소 '엄마'의 정을 가슴 찡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2000년 몽골에서 시집 온 버드씨는 고향 울란바토르에 70대인 친어머니가 있지만, 지난 9년 동안 네 번밖에 만나지 못했고 멀리서 행여 걱정할까 전화로 속 시원히 얘기하기도 힘들었다.
마음 터놓고 얘기할 이가 없던 버드씨에게 양씨는 든든한 의지처가 됐다. 양씨가 딸의 집에 깻잎, 콩자반, 멸치볶음 등 반찬을 싸서 보내고 버드씨도 맛있는 것만 생기면 지하철로 20분 정도 떨어진 엄마 집으로 달려갔다.
"아들 하나만 둬 평소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타향살이에 외로워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을 보면 늘 안쓰러웠는데 마포구청에서 연락이 와 참여했어요." 양씨는 "딸에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데 많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최옥갑(50)씨도 베트남에서 온 딸 타이티 헌화(41)씨로부터 한글은 서툴지만 따뜻한 편지를 건네받았다. '엄마, 지난번에 비누와 화장품 만들어 주신 것 잘 쓰께요(쓸게요). 제가 엄마 많있는 것(맛있는 것) 사줄 거에요.
엄마랑 행북(행복)하게 잘 살아요.' 얼마 전 최씨가 헌화씨 피부가 많이 상했다며 비누공예교실에서 배워 만든 천연비누를 선물한 데 대한 감사 표시였다.
사실 최씨와 헌화씨는 나이가 아홉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아 모녀이자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다. 헌화씨의 남편 조경범(51)씨가 오히려 장모보다 한 살이 많지만 조씨는 늘 "장모님~, 장모님~" 하며 최씨를 따른다.
얼마 전 헌화씨의 생일에도 조씨가 '장모님, 이번주 헌화 생일인데, 토요일 저녁 먹는 자리에 몰래 오세요'라고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최씨는 당일 저녁 식사자리에 케이크과 꽃을 들고 깜짝 등장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가까이에 외가가 생기니 더 좋은 것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다. 종종 "친구들은 다 외할머니 집 다녀왔는데 왜 우리는 안 가냐"며 버드씨 마음을 아프게 했던 상현(8)이도, 툭하면 "엄마, 할머니 보러 베트남에 가자"며 보채던 헌화씨 아들 강민(8)이도 이제는 '서울 외가'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김소월(53)씨와 모녀지간이 된 필리핀 출신 자넷(36)씨도 "우리 딸 은하는 외할머니가 하늘만큼 땅만큼 좋다고 한다"며 "자기는 공부방 보내놓고 엄마 혼자 외할머니 보러 간다고 질투까지 한다"고 말했다.
친정엄마를 자청하고 나선 이들은 대부분 구청이나 시민단체를 통해 자원봉사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다. 구청으로서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결혼이주여성의 멘토 역할을 맡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등록된 이들 위주로 결연을 주선했다.
결혼이주여성 친정엄마를 모집한다는 구청 이메일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김기인(65)씨였다. 구청 관계자는 "누가 이런 것을 신청할까 고민했는데, 메일을 보내자마자 바로 신청자가 나타나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새 딸은 베트남에서 온 자린(23)씨. 하지만 이날은 집안에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 이날 참여자들이 리본 공예를 함께 배운 뒤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공예 강사가 시범으로 만든 리본 장식 볼펜을 가져갈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씨가 번쩍 손을 들었다. 강사가 "한국인 어머니들은 조금 양보해달라"고 했지만, 김씨는 한달음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 자린이는 오늘 못 나왔잖아요. 이거라도 엄마가 챙겨줘야죠." 자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몸을 던지는 한국 엄마들의 그 모정, 그대로였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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