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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겨울나무는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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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겨울나무는 쉬고 싶다

입력
2009.12.0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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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나무들은 잎을 다 털어내고 완전한 휴면에 들어갔다. 낙엽이 숲 바닥에 고이 떨어져 미래의 양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을 상처 없이 떨어뜨리기 위해 나무는 줄기와 잎자루의 경계에 떨겨층, 분리층을 만든다. 한 여름 폭풍에도 떨어지지 않던 나뭇잎이 떨겨층에서는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진다. 나무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소비하면서 긴 겨울을 보낼 수 있다.

도시의 나무들은 미련이 많다. 도시의 미지근한 겨울 공기는 나무에게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놓치게 만든다. 단풍 색을 만들지 못한 나뭇잎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빛 바랜 초록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겨울로 접어들어도 나뭇가지는 미처 떨겨층을 만들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거리의 가로수들은 가을이 다 지나도록 누렇다 못해 희끗하게 탈색된 잎을 그대로 달고 있다. 도시의 겨울은 그렇게 불분명해졌다.

빈 가지가 그대로 드러난 나무는 삶의 이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무성한 잎을 달고 있던 가지 끝에는 내년에 싹틀 눈이 만들어져 있다. 가지 하나를 잡아 큰 줄기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그 정교함과 완벽함에 현기증이 난다. 내년 봄, 지금의 가지 끝에서 새로운 줄기가 자라면 정작 자신들은 새 가지가 좀 더 높이 뻗을 수 있도록 지지하는 일로서 평생을 버틸 것이다. 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가지와 묵은 가지로 높이와 깊이를 더해간다. 나무의 외형이 주는 감동은 거대한 몸집 자체가 아니라 미약한 가지들의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완벽한 조직력에 있다.

나무가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구조만이 아니다. 잎에 가려져 있던 무수한 상처들이 여기저기 드러나면 사람의 마음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겨울 추위에 얼어터진 줄기, 곤충이 파먹어 들어간 동공, 부러진 가지, 사람들이 잘라낸 가지의 옹이,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는 몸이다.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마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한 나무들이기에 더욱 가슴 저리다. 겨울 대지에 남겨진 나목(裸木)들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을 주문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나무들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색색의 전구 불빛이 겨우내 나무에서 빛난다. 겨울 불빛을 위해 나무들은 일 년 내내 전선을 감고 있었다. 나무의 연약한 눈은 불빛이 내뿜는 열기에 타 들어간다. 체온이 오르면서 목이 마르고 숨이 찬다. 뿌리도 줄기도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불면하는 나무는 살이 마른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처지에 도시적인 환경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제 몸에 열을 내는 전구까지 걸쳐야 하는 나무를 보는 일은 상처 난 줄기를 보는 것보다 마음 아프다. 온통 화려한 빛으로 치장한 도시의 야경에서 굳이 나무마저 빛날 이유는 없다. 나무는 잠시 쉬고 있을 뿐, 살아있는 생명체다. 도시에서 나무 하나쯤은 자연 그대로, 그렇게 의연해도 되지 않겠는가.

만성적인 소음과 오염된 공기, 빈곤한 토양을 생각하면 도시의 나무로 살아가는 일이란 참으로 고달프다.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매번 묵은 잎을 정리하고 새잎을 달기 때문이다. 가을 낙엽을 보면 그만큼 공기가 깨끗해졌으리라는 믿음으로 숨쉬기가 약간은 수월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人)은 나무(木)로서 몸과 마음을 쉬(休)었다. 겨울 동안 이제 나무를 쉬게 하자. 그냥 두기만 해도 될 일이 아닌가. 그래야 나무가 고단한 도시에서의 삶을 이겨낼 힘을 얻지 않겠는가.

차윤정 생태전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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