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자신을 평가한다. 과학 기술도 마찬가지다. 타인 앞에 내보이면 개발자도 몰랐던 사실이 발견될 수 있고, 산업화의 길도 의외로 술술 열릴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 과학계에선 이게 쉽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나온 기술이 산업 현장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험했다. 그 길이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22개 21세기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단이 만들어 낸 기술 중 몇몇은 죽음의 계곡을 벗어났지만 아직 이 계곡의 위력은 여전하다.
기술의 객관적 가치 매겨야
이산화탄소저감및처리기술개발사업단의 이영무 한양대 응용화공생명공학부 교수는 최근 연구개발 지원 업체 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2007년 사이언스에 실린 이 교수의 기술을 눈여겨본 이 기업이 10여 가지 분야로 확대해 응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이 교수가 개발한 건 이산화탄소를 분리하는 고분자다공성막. 기존 비슷한 소재보다 구멍 크기를 1옹스트롬(100억분의 1m) 늘렸다. 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는 구멍 크기가 이 정도면 수처리나 연료전지 같은 다른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걸 간파했다.
많은 양의 물을 빠른 속도로 거를 수 있고, 전기를 일으키는 수소이온을 효율적으로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팀은 분리막을 수처리와 연료전지용으로도 바꿔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작물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베트남과 인도에선 벼알마름병이 큰 문제다. 이 병에 걸린 벼에서 난 쌀을 사람이 먹으면 독소 때문에 몸이 마비된다. 사업단은 벼알마름병 독소를 분해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최양도 단장은 "국내에는 없는 병이라 수출하려고 개발한 기술"이라며 "기술 컨설팅 기업 마크프로가 이 기술의 가치를 약 2억달러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사업단은 현재 베트남 인도와 기술 수출 협의를 하고 있다.
신기술을 산업화하려면 얼마만큼의 활용 가치가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를 연구자 스스로 하기엔 무리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을 테니 말이다. 또 기술 가치를 평가하려면 최근 산업 동향이나 법률 정보까지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한 우물만 판 연구자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교육과학기술부에는 기술 컨설팅이나 기술 가치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개발 지원 업체가 100여 개 등록돼 있다. 그러나 이들 업체와 연구자가 실제로 만나는 기회는 아직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 교수는 "연구 생활 30년 만에 기술 컨설팅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연구자 수에 비해 기술 컨설팅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기술 컨설팅에 대한 연구자들의 인식도 낮다. 현재호 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 대표는 "기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면 '너희가 뭔데 그러느냐'고 되묻는 연구자들이 아직 많다"며 "연구자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기술 컨설팅 비즈니스의 중요성을 연구자들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자와 산업계 가교 역할 강화해야
기술 가치 평가뿐 아니라 특허 관리의 어려움도 죽음의 계곡에 놓인 큰 걸림돌이다. 원천기술을 산업화해 경제적 이득을 창출하려면 무엇보다 철저한 특허 관리가 필수다.
하지만 실험만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연구자들에겐 이 역시 쉽지 않다. 해외 특허는 출원에만 약 2,000만원이 든다니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의 고상석(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췌장암의 전이를 막을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한 후 특허 법인 다인에 도움을 요청했다.
고 연구원은 "특허명세서에서 주의 깊게 보지 못했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 냈다"며 "그대로 출원됐다면 특허 범위가 축소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론티어사업단과 연구개발 지원 업체, 특허 법인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건 프론티어연구성과지원센터다. 2007년 설립된 이 센터는 사업단에서 나오는 연구 성과를 분석해 기술 컨설팅과 해외 특허 출원 같은 산업화 절차를 돕는다. 사업단의 여러 연구팀에게 해외 특허 출원 비용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센터의 지원 혜택을 받는 연구자는 아직 소수다. 권재철 센터 사무국장은 "인력이 부족해 시장 정보 분석이나 기술 마케팅, 특허 상담까지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라며 "이런 기능이 활발히 이뤄져야 원천기술이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지면서 '연구개발 투자는 밑 빠진 독'이라는 비판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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